'선녀와 나무꾼' 다시 읽다
권영상
“달님, 제 처자를 돌려주세요.”
나무꾼과 살던 선녀가 하루아침에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세상에 이렇게 황당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것도 제 아이 둘을 지아비가 빤히 보는 앞에서 껴안고 달아난다? 형형한 대명천지에?
카톡 없는 세상에서 구원을 요청할 데라곤 딱 한 군데. 오늘 같은 보름밤 보름달이다. 나무꾼은 보름달에게 소원을 빈다. 빌면서 생각해도 제가 참 어처구니 없는 놈이다. 아이 셋 낳을 때까지 날개옷을 주지 말라고 했는데, 그 약속을 잊고 날개옷을 주었다가 변을 당했다. 선녀는 지금 어디에 가 있을까? 아무도 갈 수 없는, 그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하늘 나라에 가 있다. 그 아내를 만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는 없다. 있다면 혹시 보름달밖에.
나무꾼은 선녀와 어떻게 만났는가.
어느 날, 나무꾼은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을 만난다. 그는 거짓말로 사냥꾼을 속여 사슴을 살려준다. 그 은혜의 댓가로 사슴은 고급 정보를 생명의 은인인 나무꾼에게 준다. 고급도 고급도 이렇게 고급스런 정보가 없다. 깊은 산속 어디어디 폭포 아래에 선녀들이 목욕을 하러 온다는 거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중 한 선녀의 날개옷을 감추어 두었다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거든 데리고 살라는 거다. 그러고 보면 사슴, 이거 보통 눔이 아니다. 아무리 나무꾼이 저의 생명의 은인이라 해도 그렇다. 제 목숨 소중한 걸 알면 남의 목숨 소중한 것도 알아야 하는데 선녀의 정조를 빼앗아 그 몸을 소유까지 하라고 일러준다. 얼핏 보면 이 이야기가 보은을 테마로 하는 것 같은 데 이건 좀 지나치다. 사슴은 좋은 평판과 달리 비도덕적 인물이다.
사슴의 직업은 무얼까?
요즘 말로 하면 뚜쟁이쯤이 아닐까 싶다. 그는 이 이야기 속에서 선녀와 나무꾼을 만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또 하나, 나무꾼은 누구인가. 깊은 산속에서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가난한 총각이다. 노총각이겠다. 처녀라곤 없는 깊은 산속에 홀로 사는 총각이라. 그의 소원은 뻔하다. 목마르도록 이쁜 처자를 하나 얻는 일이다. 그는 보름달 뜨는 밤이면 달에게 처자 하나 점지해 달라고 빌었을 테다. 그 사실을 산속을 헤집고 다니는 사슴이란 자가 모를 리 없다.
그러던 찰라에 나무꾼은 사슴이 알려준 정보를 가지고 산중 은밀한 폭포를 찾아간다. 보름달빛이 산속을 환하게 비추는 그 그윽한 달밤. 이윽고 이쁘기로 말하면 서러울만큼 이쁜 선녀들이 하늘하늘 하늘에서 내려온다.
좀 빗나가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당시 남성들의 의식 속엔 굉장히 에로틱한 면이 있다. 보름달 뜨는 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상, 깊디깊은 산속 어느 폭포에 하늘에서 내려온 미녀들이 옷을 벗고 목욕을 하고, 밤이 깊으면 다시 하늘나라로 올라간다는 이 상상력. 참 기막히지 않은가.
정말 아름다운 장면이다. 아름답다 못해 환상적이다. 선녀머리를 한 여인들이 하얀 날개옷을 너울거리며 꽃잎처럼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다. 남성의 머리가 상상해낸 최대의 명장면이지 싶다. 한 명도 아닌 여럿이, 세상 볼일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산중에 목욕을 하러 내려온다.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이 선녀들의 정체를 알고 싶다.
성을 금기시 하는, 성스러운 곳에 사는, 섹스가 없는, 또는 섹스를 탐해서는 안 되는 신성한 신분의 여인들일지도 모른다. 왕 이외의 다른 남성과 만나서는 안 되는 성적 억압을 받는, 그래서 보름달이 뜰 때마다 인간 세상에 성을 탐닉하러 오는 일군의 여인들이 아닐까. 그 여인들 중의 한 명, 나무꾼과 만나 ‘아이 둘을 낳는’ 그녀는 누굴까. 답은 다양하겠다. 선녀라고 다 깨끗한 여인일 거라는 건 잘못이다. 소설 ‘구운몽’에 나오는 팔선녀들은 모두 인간 세상에 내려와 성진이와 인간 세상의 운우지락 즐긴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본다면 ‘그녀’는 불륜을 탐하는 여인이거나, 결혼은 하였으되 수태를 못하는 여인이거나, 혼외 임신을 강렬히 원하는 여인이거나.
산중 연못가에 내려온 선녀들은 목욕을 하기 위해 비슷한 자리에 옷을 벗어둔다. 그러나 그들 중 ‘그녀’는 나뭇꾼의 눈에 잘 띄는 곳에다 저의 옷을 벗어둔다. 나무꾼이 다른 선녀의 날개옷을 감춘다면 이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슴과의 약조가 틀어지고 만다. 그러니 특정 나뭇가지나 특정 바위 위에 벗어둘 것이다. 그리고는 실오라기 하나 없는 몸으로 못속에 들어간다.
이제 이쯤에서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신윤복의 ‘단오풍정’이란 그림이다. 중년의 여인들이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놓고 산속 골짝에서 머리 감는 모습을 은근히 엿보는 두 사내놈이다. 신윤복도 그 무렵 이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쯤은 알았을 테다. 혹시 이걸 모티프로 '단오풍정'을 그린 건 아닐까. 딴 생각말고 다시 보자. 가까운 바위 뒤에 숨어 이 장면을 훔쳐보는 산골 나무꾼의 가슴은 어떠했을까. 이 이야기가 신윤복의 ‘단오풍정’보다 더 에로틱한 것은 ‘그녀’를 바라보는 산중 나무꾼과 그의 눈길을 은밀히 받으며 숨막히듯 황홀해하는 ‘그녀’가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쯤이면 사단이 나게 마련이다. 그 사단이라면 정상적인 방법으로 여자를 유혹할 수 없다. 왜냐? 상대는 신성한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면 모르기는 해도 그녀들은 당시 사회의 최고 신분의 여자인 듯 하다. 그런데에 반해 나무꾼은 가난하고 힘없는 하층민이다. 그러니 당연코 이들의 로맨스는 정상적일 수 없다. 나무꾼이 황진이처럼 두뇌가 명석하다면야 저를 사모하는 벽계수를 말잔등에서 떨어지게도 할 수 있지만 아직 나뭇꾼은 그런 수완이 없다.
사슴이 시키는 대로 야비하긴 하지만 서로 약속한 ‘그녀’의 날개옷을 감추는 일이 고작이다. 목욕은 다들 끝나고 이제는 돌아갈 시간. 그때 한 명의 선녀가 날개옷이 사라졌다며 음흉한 눈물을 흘린다. 그러자 선녀들은 다 짜여진 각본대로가 아니냐며 하늘로 날아간다. 두 아이를 양팔에 안고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는 부력이라면 여럿의 선녀들이 날개옷 없는 선녀쯤 왜 못 데리고 갔을까. 그걸 보면 여기엔 분명 숨겨진 각본이 있다.
좀은 뻔한 방식이긴 해도 사슴은 이런 방식으로 선녀와 나무꾼을 조인트시킨다. 이로 보아 사슴은 분명 얼마간의 구전을 받는 뚜쟁이면서 그것을 이루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협잡군이다.
“아이를 셋 나을 때까지 날개옷을 넘겨주지 마시오.”
목숨을 살려준 이에 대한 보은치고 야비하고 비열한 보은이다. 여인의 인격과 상관없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밟아버리라는 말로 들린다. 구전을 챙긴 중매자의 본성이 드러나는 듯 하다.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세상 일에 이토록 비정한 사슴이 일개 나무꾼에게 이런 호의를 베푼다면 그 나무꾼은 대체 어떤 인물일까, 그 의문을 지울 수 없다. 그냥 산중에 묻혀사는 나무꾼에 불과한 존재인가.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할만한 곳이라면 인적없는 심심산중이어야 한다. 그런 산중에 현실적으로 멀쩡한 사내가 들어와 살 리 없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일까. 신분상승을 꾀하려는 자이거나, 아니면 사랑해서는 안 되는 여인(선녀)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내일 수도 있다.
산중의 오두막은 이들이 도피하여 사랑을 나누는 공간이라면 제법 그럴 듯한 추측이 아닌가. 신분질서가 엄혹한 사회일수록 이런 일탈의 심리는 상징성을 통해 나타나게 마련이다. 이 이야기가 아주 오랫동안을 인구에 회자한 것만 보아도 그 속에 묘한 성적 심리를 자극하는 뭔가가 있다는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아이 셋을 낳을 때까지’라는 말을 잊고 나무꾼은 날개옷을 선녀에게 준다.
날개옷을 입어보는 척하던 선녀는 돌연히 안녕을 고한다. 그리고 두 아이를 가로채어 안고 하늘로 날아가 버린다.
선녀는 그렇게 사내 곁을 떠났다.
그러고 보면 선녀는 분명 아이가 필요한 인물일성 싶다. 아이를 수태하기 위해 절박하게 애쓰는, 못난 남편을 둔 여인이 아닐까. 힘센 총각 나무꾼이 달아나는 여인을 뒤쫓아가지 못하는 걸 보면 그 여인은 필시 외간 남성과 가까이 할 수 없는 지체높은 세도가의 여인일 수 밖에 없다.
아내를 잃은 나무꾼은 사슴을 만나 절망적인 사정을 이야기한다. 그러자 사슴은 또 하나의 비상구를 제시한다. 보름밤이면 하늘나라에서 물을 긷기 위해 두레박을 내려보낸다는 거다. 왜? 나무꾼과 선녀의 로맨스가 세상에 알려져 연못으로 가는 은밀한 통로가 폐쇄되었기 때문이란다. 그러니 두레박을 잡아타고 하늘나라로 올라가라는 정보다. 사슴은 역시 비상한 인물이다. 나무꾼은 또 사슴이 시키는 대로 두레박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선녀를 만난다. 그리고 옥황상제에게 자신이 선녀의 사내며, 이 두 아이의 아버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주장을 명쾌하게 입증할 방법이 없다. 그 때문에 이 지체높은 신분사회에 입사하기 위한 온갖 시험과 시련에 시달리던 나무꾼은 어머니를 증인으로 삼기 위해 천마를 타고 산골 고향으로 다시 내려온다.
"이 놈아! 정신 차려라.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사는 법, 가당치도 않는 여자 때문에 몸을 다치려 하지 말라."
모르기는 해도 늙으신 어머니는 핼쓱한 몸으로 돌아온 자식을 보자, 가슴이 미어터져 이렇게 야단을 쳤을 것이다. 부모라면 너무도 뻔하게 튀어나올 말이 아닌가.
나무꾼 아들은 어머니가 만들어준 죽을 말위에서 먹다가 흘리는 바람에 놀란 천마는 달아난다. 혼자 외롭게 남은 아들은 하늘만 쳐다보다가 그만 죽고 만다.
스토리 상으로 보아 나무꾼의 캐릭터는 매우 소극적이다. 사슴이 시키는 대로 선녀의 날개옷을 숨긴다. 또한 달아난 아내를 적극적으로 돌려세우지도 못한다. 어쨌거나 이렇다할 노력 한번 보여주지 못한 채 괴로워하다가 결국 죽고만다.
그런가 하면 선녀는 적극적이다. 우선 남성을 만나러 오는 방향도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귀인 하강방식이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었다고 판단될 때면 분연히 사내 곁을 떠날 줄도 안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와 다시 결합하여 오순도순 살자고 애원하는 남자를 단호히 거부할 줄도 안다.
옛날이야기라는 것이 대부분 해피엔딩인데 이 이야기만큼은 그와 다르다. 결말이 비참한 것 같다. 그러나 아니다. 나무꾼 쪽에서 볼 때 그렇고 선녀 쪽에서 보면 새드엔딩이 아니라 분명 소원을 다 이룬 해피엔딩이다. 남성중심 문화에 익숙해진 우리들의 편향된 코드 때문이다.
남성이 이처럼 데데하게 나오는 소설로 병자호란 이후의 ‘박부인전’이 있다. 전쟁소설인데도 호병을 물리치는 적극적인 인물은 남성이기 보다 여성 박부인이다. 임진 병자 양란을 통해 남성들이 사뭇 데데해졌다. ‘선녀와 나뭇꾼’도 어쩌면 이런 조선 중기 이후의 분위기와 맞물려 우리나라에 들어와 전 지역으로 퍼져나간 듯하다. 이로부터 남성 중심의 부계사회가 차츰 힘을 잃어 오늘날 양성 평등 내지 여성우월 모계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오늘이 정월 대보름이다. 얼른 바깥에 나가 나도 나무꾼처럼 보름달을 만나보자. 뭔가 소원이라도 하나 빌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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