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 절박한 삼년고개
권영상
옛날 어느 마을 뒷산에 삼년고개가 있었다. 그 고개엔 한번 넘어지면 삼년 밖에 못 산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 한 분이 고개를 넘다가 돌부리에 걸려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시작되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다 잘 아는 ‘삼년고개’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보았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때는 그 삼년고개에서 넘어진 할아버지의 ‘3년밖에 못 사는’ 절박한 고민 따위엔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그냥 어린 손자인지 동네 아이인지 그 똑똑한 녀석의 권유로 삼년고개에 다시 올라가 할아버지가 데굴데굴 구르는 게 재미있었다.
한번씩 구를 때마다 누군가 숲에서 “삼 년이요!”, “육 년이요!” ,“구 년이요!” 하던 그 목소리가 신기하고, 어린 우리를 웃기게 만들었다. 이 절실하고 절박한 이야기가 재미있기만 했던 건 삼년고개에서 넘어지면 삼 년밖에 못 산다는 설정 때문이다. 멀쩡하게 잘 살던 사람이 난데없이 삼년 밖에 못 산다. 이건 인생에 대한 절망이요, 낙담이다. 인생의 곡선을 그린다면 최저다. 그런데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순간순간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어 간다는 점이다. 한번 구를 때마다 수렁에서 생명줄을 잡고 빛이 보이는 세상으로 올라오듯 한 살 한 살 더 산다는 상승구도. 그때문이 아닌가 한다.
“삼년이요.”
“육년이요.”
“구년이요.”
이 신비한 목소리는 낙담한 어린 우리들의 한숨을 기쁨으로 바꾸어주는 환희와 생명의 노래였다. 동시에 6.25 전란 후의 폐허가 된 우리 마음의 컴컴한 어둠을 밀어내고 차츰차츰 빛으로 가득히 채워주는 그런 구실도 했다. 그런 까닭에 이 이야기는 우리의 마른 입에 웃음을 살려내었다.
이야기는 사뭇 웃겼다. 왜 안 우스운가. 사람의 엄중한 수명이 그리 쉽게 줄었다 늘었다 한다는 게 너무도 이야기답기 때문이다. 신만이 주무르는 사람의 목숨을 사람 사는 세상의 삼년고개가 한다. 누가 그리하게 하는가? 이 이야기를 만든 당시 사람들이다. 대범하다.
사람의 목숨을 관장하는 일을 이 땅에 내려다 놓고 원하는 만큼씩 살겠다는 배포가 대범하다. 그렇다고 사람이 천년만년 살았는가? 아니다. 그냥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정도만 살았다. 그 말은 살만큼 살다가 죽겠습니다라는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람이 살만큼 살지 못할 때가 있다.
요 몇 해 전 일이다.
늦은 여름날 청계산 매봉에 올랐다가 원터골로 내려오는 길이었다. 어느 만큼 내려오다 보니 사람들 많이 다니는 길이 그만 싫어졌다. 초행인데도 호젓한 길을 택했다. 어떻든 그 길을 쭉 내려오면 마을버스가 다니는 길을 만날 거라는 생각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여러 개의 수목원이 나왔고 그 수목원 끝에서 민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텃밭도 나왔다. 늦은 여름이라 밭에 남은 거라곤 옥수수와 고추였다. 그해는 장마가 심했다. 그곳도 장마를 피할 수 없었다. 고추밭에 남아있는 성한 고추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고추밭 둑을 내가 지나가고 있을 때다.
“이보시우!”
누가 나를 불렀다.
저쪽 고추밭 가에 파란 양산을 쓰고 앉은 낯선 노인이었다. 얼핏 보아 70대 중반쯤 될까. 그 분이 내게 손짓을 했다. 다가가자, 노인이 곁에 따 둔 고추 두어 움큼 건넨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집어주는 대로 두 손에 고추를 받았다.
“아니, 이 많은 걸 낯모르는 제게 왜 주시는 거지요?”
당연히 나는 물었다. 안 물어볼 수 없지 않은가. 이게 뭔 고추인지. 먹어도 되는 건지. 먹어도 되는 거라면 왜 길 가는 낯선 사람을 불러 한 움큼씩 집어 주는지. 고춧값을 내야한다면 얼마를 내야하는지.....
내 질문에 수심 가득한 노인이 “그냥 드리고 싶어서.” 한다.
아무리 그냥 드리고 싶은 고추라도 그냥 넙적 받아가는 것도 뭔가 좀 쑥스러웠다. 노인은 한눈에 보기에도 기룸한 얼굴의, 후덕한 인물이었다. 지금 고추밭 둑에 앉아 있다고는 하나 글줄도 읽고 세상의 공명도 겪어본 얼굴이었다. 다만 뭔가 얼굴빛이 어두울 뿐이었다.
“혹 무슨 까닭이라도?”
내가 허리를 낮추어 여쭈었다.
머뭇거리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목숨을 좀 이어볼까 해서....”
역시 그런 까닭이 있었다. 머뭇거리던 노인은 그 이야기를 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오래오래 사시라는 말씀을 해 드리고 그분 곁을 떠나왔다. 세상의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그 무엇에 시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금방 돌아가실 만큼의 노약한 나이는 분명 아니었다.
노인 곁을 떠나오다가 멈추어 뒤를 돌아다 봤다. 그분은 거기 그대로 땡볕에 파란 양산을 쓰고 앉아 있었다. 사람을 짓누르는 땡볕과 그 아래 병의 침범을 당한 채 앉아있는 힘없는 인간. 뭔가 절박한 기운이 노인의 주위를 휩싸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 그 분의 명을 늘여드릴 삼년고개 하나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게 한스러웠다. 지푸라기 하나 잡는 심정으로 이렇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고추 한움큼씩을 건네는 노인이 가여웠다. 누구든 이런 딱한 때를 당하면 이렇게라도 공덕을 지어 목숨을 이어보고 싶어하지 않을까.
우리나라 옛날 이야기에도 목숨을 연명하는 방법이 있다. 북쪽하늘 북두칠성님에게 비는 일이다. 북두칠성이 사람의 명을 관장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몹쓸 일을 많이 하든가 험한 일을 하여 액운을 물리치기도 했다. 또 하나, 삼천갑자 동방삭이가 쓴 방식도 있다.
이 자는 중국 한나라 때 사람인데 서왕모가 심은 복숭아를 훔쳐먹고 인간세상에 도망을 왔다. 저승에서 그걸 가만 보고만 있을리 없다. 사자를 내려보냈다. 동방삭은 꾀를 내어 자신을 잡으러온 저승사자를 아주 융숭하게 잘 대접했다. 무얼로 대접했나? 저승사자도 하늘의 공무를 보는 자이다. 공무를 보는 자들이 좋아하는 게 있다. 묵직한 사과상자다. 저승사자에게도 두둑한 노자가 필요하다. 그것만으로 제 목숨을 가지러온 저승사자를 위무할 수 있을까. 없다. 그렇게 간단하다면 죽을 자가 있을 리 없다.
그 다음엔 무슨 선물이 좋을까? 신발이다. 신발 몇 컬레쯤은 선물해야 한다. 승용차가 있는 것도 아니요, 전용 비행기가 있는 것도 아닌 시대다. 주로 발품을 팔아 공무를 집행하러 다니는 그에겐 신발 선물이야말로 안성마춤이다. 그 다음에 대접할 일이 또 있다. 푸짐한 음식 대접이다. 하루에 수 만리씩 다녀야 하니 배도 고프다. 곰탕이나 설렁탕 가지고는 안 된다. 신선로에 팔보채, 호랑이 심장이나 용의 눈물 정도는 받아다 먹여야 죽음을 면할 게 아닌가.
“아주 잘, 맛나게 잡수셨나이까?”
동방삭이 깍듯이 저승사자에게 인사를 드린다.
“별로 아주 잘 먹었네.”
저승사자가 인사를 받고 내려준 선물이 있다. 놀라지 마시라. 저승 명부에 적혀있는 삼십갑자 밖에 못 살 동방삭이의 명을 대저 삼천갑자나 살도록 공문서를 위조해 주었다. 삼천갑자라니! 1갑자가 60년이니 3천갑자라면 무려 18만년이다.
해도해도 너무하다.
살아도 살아도 이토록 많이 살게해 주다니! 이게 중국사람들 머릿속의 목숨에 대한 욕심이다. 붕새가 한번 날갯짓을 하면 수만 리를 간다고 했으니 사람도 한번 살면 18만년을 살아보겠다. 대륙적 기질이다. 18만 년이라면 대체 어떤 세월인가. 호모에렉투스가 이 땅에 나타난 게 150만년 전이다. 그들이 아프리카에서 북상을 해 유럽에 도착한 게 100만년 전이고, 아시아로 건너온 때가 80만년 전이다. 중국의 전설적인 황제 신농씨가 252가지의 식물을 소개했다는 책이 나온 게 기원전 2698년이다. 하, 놀랍지 않은가. 18만살을 살았다면 신농씨가 책을 내놓기 17만 5천년 전의 인물이라는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수명에 대한 욕심은 중국과 좀 다르다. 그들이 한도 끝도 없는 욕심에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나라는 오래 사는 일에 좀 미안해하는 편이다. 아무리 지어내는 이야기라 해도 그렇게 한도 끝도 없이 사는 인생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옛날이야기를 보자면 다들 “3남 2녀를 낳고 오래 오래 살았습니다.” 정도다. 오래오래란 몇 년을 말할까? 천년? 아니 만년? 그렇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에 보면 “저기 저기 저 달속에 초가삼간 지어놓고 천년 만년 살고지고”라는 노랫말이 나온다. 그러고 보면 천년 만년쯤이다. 18만년에 비하면 너무 소박하다. 천년 만년이 전부인가? 아니다. 천 년 만년도 턱없이 많다. “하노뱅녀느을 사자는 데에 웨엔 서엉와아냐!’ 이 타령을 보면 오래 오래란 그저 '오백 년' 정도다. 한오백년. 더 이상은 우리의 연명소망을 깎고 싶지 않다. 이 정도, 500년 정도가 사람의 나이에 대한 욕심으로 적절하다고 본 게 우리나라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동방삭이란 자는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나이를 산다. 이걸 우리나라의 현실적인 조상님들이 그냥 즐겁게 보아줄 수만은 없다. 왜냐? 동방삭이 이 자가 18만년을 사느라 인간 구렁이가 다 됐지 뭔가. 그러니까 세상 일에 아주 통달해 버렸다네. 통달해 버렸으니 당연히 모르는 게 없지. 그래 가지고 피해갈 구멍도 다 알아버리고, 잡혀갈 자리도 다 알어버렸어. 막힌 담장은 능구렁이 담장 넘듯이 구물구물 다 타넘어버리네. 세상의 희노애락이며 인간 운명의 비밀까지 다 꿰고 있다 이 말이지. 도대체 오래 사는 걸 미안해할 줄 모른다 이거야. 그러니 저승은 동방삭이 때문에 사뭇 골치아팠지.
급기야 <삼천갑자 동방삭> 이야기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어떻게 들어왔느냐? 이렇게 들어왔다.
동방삭이가 너무 오래 살고 보니 저승에서 그를 잡아오라고 사자를 보냈다. 사자는 사람이 많이 다니는 냇가에서 숯을 씻었다.
“숯을 왜 씻는가?”
아, 그때 마츰 길을 가던 사람이 물었다.
“숯을 자꾸 씻으면 하얗게 된다 하여 씻고 있소이다.”
그렇게 대답했다.
“하아, 내가 삼천갑자를 살아도 처음 듣는 소리로다.”
지나가던 사람이 아, 이렇게 말했것다.
그 말을 듣자 사자가 옛끼놈! 하고 동방삭을 저승으로 잡아갔다.
무엇보다 우리들 의식엔 오래 사는 일을 ‘징그럽다’고 여긴다. 어른들에게 앞으로 한 백 년을 더 사시라고 말씀드리면 열이면 열 고맙다 하기보단 ‘징그럽게시리.’ 그러신다. 그저 병들지 않고 살만큼 알맞게 살다가 아름답게 가는 걸 가장 소망하는 게 오늘이나 그 옛날의 우리들 마음이다. 그게 지구를 덜 망가뜨리는 일이고 다음 세대에게 덜 미안한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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