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고 편안한 모습의 여인
권영상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작품 심사가 있어 3호선 전철에 올랐다. 그곳으로 가려면 옥수역에서 중앙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옥수역에서 전철이 멎자 나는 내렸다. 중앙역을 찾느라 두리번거리는데 누가 내 허리를 잡아당긴다.
“아저씨, 버스 갈아탈 돈이 좀 부족해서 그러는데.....”
젊은 대학생쯤 되는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얼마가 필요하냐고 물으려다 말고 그냥 주머니에 있는 돈을 주고는 부랴부랴 긴 통로를 따라 뛰었다. 20여분씩 기다려야 하는 중앙선 전철이 때마침 눈앞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 젊은이에게 적은 돈이나마 건네준 보상이려니 하고는 얼른 전철에 올랐다. 이게 또 웬일일까. 용문 방향으로 가려는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도 앉을 자리가 남아 있다. 나는 뜻밖의 자리에 앉아 오랜만에 나트막하게 만나는 한강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휠체어를 탄 쉰 중반의 남자가 다가왔다.
“좀 도와주세요. 좀 도와주세요.”
그는 부지런히 손때 묻은 종이 한 장씩을 무릎에 얹으며 지나갔다. 전철에 오르면 늘 보는 그 쪽지였다. 이런 쪽지를 돌리는 걸 보면 보통은 주욱 돌리고 난 뒤 잠시 시간을 준다. 이를테면 마음의 결정을 내릴 시간을 주기 위해서다. 그러고는 좀 도와달라고 한 마디쯤 하고 다시 쪽지를 걷는다. 그런데 남자는 그러지 않았다. 그냥 쪽지를 나누어주면서 ‘좀 도와주세요’를 반복한 뒤 숨쉴 겨를도 없이 이내 쪽지를 되걷으며 왔다. 환승역인 청량리역이 불과 두어 역밖에 안 돼서 그러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나누어 줄 때처럼 빠른 속도로 앉은 이들의 무릎에 놓은 종이를 걷고 있었다. 사무적으로 하는 듯해서 그런지 누구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나도 주머니에 손을 넣을 생각이 없었다. 방금 버스비를 보태달라는 젊은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마음을 돌릴 시간 여유가 필요했다. 그건 아니다. 솔직히 그런 것과 상관없이 내 마음이 선뜻 가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란 게 뭐 꼭 그런가.
나는 그렇게 망설이고 있는데 내 곁에 앉은 여자분은 나와 좀 달랐다. 몸을 움칠하더니 손가방에서 뭔가를 꺼내고 있었다.
그 사이 남자가 쪽지를 걷으며 내 오른쪽까지 다가왔다. 잠깐 사이 나는 도와줄 마음을 접었다. 그러고는 그 남자와 혹 눈이라도 맞추게 될까봐 눈을 한강에 두었다. 남자가 손을 내밀어 내 무릎 위에 놓았던 종이를 집어들었다. 내 마음이 찔끔했다. 그와 동시에 내 곁에 앉은 여자가 그 남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내 눈은 한강에 가 있었지만 쪽지 위에 천 원짜리 두 장이 얹혀있는 것쯤은 볼 수 있었다. 쪽지머리에 굵은 글씨로 쓰여있는 ‘배가 고파요.’라는 글귀도 눈에 들어왔다.
“고맙습니다.”
남자는 가볍게 목례를 하며 그 ‘배가 고파요’와 지폐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이내 다음 칸으로 가버렸다. ‘배가 고파요.’라는 글귀가 자꾸 눈에 떠올라 도와드리지 못한 게 미안하고 옆사람 보기에 민망했다. 그러면서 내 곁에 앉은 여자분이 또 궁금해졌다.
“대체 이 분은 누구일까?”
그렇다고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볼 수는 없다.
나는 그분이 신은 구두와 그분의 치맛자락과 그분이 안고 있는 그물 모양으로 만들어진 가죽가방, 그리고 내 어깨에 느껴지는 그분 어깨의 따스한 감촉..... 뭐 이런 것으로 그 여자분을 상상하고 있었다. 청량리역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안내 방송이 차내에서 들릴 즈음 나는 일부러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며 흘끔 그 여자분을 보았다. 뜻밖에도 몸이 크고 얼굴이 구릿빛인 멕시코나 남미쯤의 여자였다.
우리가 해야할 일을 외국인이 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우리나라가 작게 느껴지고 내가 소심하게 느껴졌다. 서둘러 쪽지를 걷는 그런 상황에서도 선뜻 돈을 꺼내 도와줄 수 있는 그분이 아름다웠다. 전철에서 내릴 때 그 여자분을 다시 한번 봤다. 조용하고 편안한 남미 특유의 인상좋은 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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