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술 취한 소

권영상 2012. 10. 5. 12:02

 

술 취한 소

권영상

 

 

 

 

술 한잔, 딱 술 한 잔을 하고 돌아오면 막상 할 일이 없다. 인사불성이 되도록 먹고 와야 들어오는 대로 쓰러져 자도 잘 수 있다. 그런데 요즘은 술도 젊은 시절처럼 술술 마실 수 없다. 그 시절엔 술을 먹어도 술 먹은가 싶게 먹었다. 그렇게 술을 먹고 택시를 타면 힘이 부쳐 그만 잠든다. 차가운 밤이슬에 깨어 일어나면 세상을 분간할 수 없는 낯선 곳에 누워 있는 나를 본다. 플라타너스 밑 나무 벤치에 내가 가방을 베고 누워 있다. 아니면 이름 모를 아파트 해바라기 줄기 사이에서 이슬에 젖는 나를 본다.

 

이제 나는 그럴 처지가 아니다. 술을 먹어도 딱 한 잔이다. 일어서도 9시면 일어선다. 그런데 딱 한 잔의 술을 먹고 집에 오면 낭패다. 얼 취한지라 반쯤 취한 정신으로 할 일이 없다. 직장에서 일하고 돌아온 아내가 저녁 설거지를 하고, 아침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나는 일찍 쓰러져 잘 수 없다.

쓰러져 잔다면 그게 아내에게 얼마나 볼상사나운 꼴인가. 술 좀 마셨다고 집에 들어와 제 몸 하나 못 추스르는 위인 같이 보일까봐 몸을 세우고 뭘 꾸물대려 한다. 베란다 빨래 건조대에 나가 내가 갤 마른 빨래 있나 내다보고, 일없이 내 방에 들러 불을 켠다. 마치 뭔 일이나 할 것처럼 컴퓨터를 켜놓고, 커피 한잔을 슬며시 타 간다. 그러는 사이에도 아내는 직장 일까지 가져와 쉬지 못한다. 그러니 ‘편한 백성’처럼 나 몰라라 코를 골며 잘 수 없다.

 

 

아내 눈치를 슬슬 살피다가 최종적으로 내가 하는 일이 있다. 리모컨을 들고 소파에 가 앉는 일이다. 텔레비전을 켠다. 육신이 편해진다. 일 분을 못 참는다. 몸이 술기운에 눌려 천근만근 무거워진다. 쇼파에 등을 기댄다. 비에 젖은 흙담처럼 내 몸이 무너질 것 같다. 웬걸! 머리가 뒤로 젖혀지면서 죄없는 벽을 때린다.

“이왕 볼 거면 좀 편하게 봐야지.”

그 말이 아내 귀에 들리길 바라면서 중얼거린다.

내가 잠들지 않았다는 걸 전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엉거주춤하게 거실바닥에 내려온다. 거실바닥과 소파 사이에 쿠션을 세워놓고 거기에 머리를 대고 편하게 눕는다. 리모컨을 들고 여기저기 채널을 돌린다.

 

 

“참 볼 거 없네.”

그런 말을 한다. 그 말은 볼 게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할 수 없이 억지로 본다는 메시지다. 아내는 내가 텔레비전 즐기는 걸 싫어한다. 술을 먹고 와 일찍 거실에 누워 방송 3사의 느끼한 드라마를 본다는 건 직격탄을 맞을 일이다. 그건 남자라면 누구나 금해야 할 일이 아닌가. 그런 드라마는 혼자 집에 있을 때나 몰래 보아야 한다.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통속적인 나도 아내한테 만큼은 통속적인 남편으로 찍히는 걸 원치 않는다.

이럴 때 내가 보아야 할 채널이 있다. 스포츠 채널이다. 유럽챔피언 축구리그나 골프 채널을 본다.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남녀간의 미묘한 심리가 드러나는 멜로물을 안 보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것도 아니면 재미없는 바둑이나 낚시, 아니면 중국영화, 아니면 정치나 국군 채널을 돌린다. 그런 따위의 채널이야말로 아내에게 지청구를 듣지 않을 안전한 채널이다.

 

점점 재미없어진다. 내 정신이 고대 풀린다. 가물가물한다. 눈꺼풀이 무겁다. 눈꺼풀이 10톤의 무게로 나를 내리누른다. 채널을 돌리려고 리모컨을 더듬는다. 없다. 예상 밖의 장소에서 리모컨이 잡힌다. 뭔가를 계속 볼 것처럼 리모컨을 가슴 위에 얹는다. 다리를 아주 쭉 뻗는다. 깜물깜물 잠이 온다. 손이 풀리면서 가슴에서 리모컨 떨어진다. 툭, 하는 소리에 나는 놀라 잽싸게 눈을 뜬다.

“자려면 안방에 들어가 자래두!”

주방 쪽에서 아내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안 자.’ 한다. 그러면서 이내 잠이 든다. 나는 코를 곤다. 코 고는 소리가 듣고 아내가 온다. 아내가 내 얼굴을 들여다 본다. 내가 잠든 걸 확인했는지 아내가 텔레비전을 끈다.

“나, 안 자.”

텔레비전 꺼지는 소리를 듣고 내가 희미하게 중얼거린다.

“안방에 들어가 편하게 자!”

아내가 편하게 자라고 종용한다.

 

 

“뭐 벌써 자.”

나는 오히려 당당히 응대한다. 아내는 내가 딱하겠다. 다시 저쪽 아내가 활동하는 공간으로 간다. 나는 쏟아지는 잠을 견디다 견디다 그만 정신줄을 놓는다. 대놓고 코를 곤다. 아내가 다시 달려온다. 거실바닥에 나를 재울 수 없다며 나를 일으켜 세운다. 내가 몸을 일으키려 움찔 한다. 아내가 “옳지” 하며 내 팔을 당긴다. 내 몸에 잔뜩 실린 잠 때문에 일어서지 못한다. 몸이 무겁고 머리가 무겁다. 나는 그만 무릎을 꿇은 채 엉금엉금 기어 안방을 향한다. 뒤쫓아 오는 아내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아니, 술 취하더니 소가 됐나!”

아내가 얼른 앞 서 가 안방문을 연다. 안방문 손잡이를 잡고 선 아내의 팔 밑을 통과해 침대 위로 기어올라 그만 눕는다.

“벌써 자면 안 되는데.......”

내 입이 아직도 살아서 중얼거린다. 나는 이제 잔다. 잔다. 잔다.

외양간에 소를 몰아넣은 아내가 외양간 문을 닫듯 안방문을 닫는다. 딸깍! 방문 닫히는 소리를 듣는지 마는지 나는 벌써 강 건너 잠의 세상에 가 농탕을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