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늦은 오후에 찾아온 사랑
-영화 ‘호스 위스퍼러’-
권영상
가족보다 자신의 일에 성취감을 느끼는 애니(크리스틴 리콧 토마스 분)는 뉴욕의 잘 나가는 여성 잡지 편집장이다. 그러나 남편 로버트(샘닐 분)에겐 좋은 아내가 아니다. 또한 딸 그레이스(스칼렛 요한슨)에게도 자상한 엄마가 아니다. 그는 다정하기보다 오직 ‘단호한 아내’이며 자상하기보다 ‘바쁜 엄마’일 뿐이다. 그를 그렇게 만든 건 어쩌면 뉴욕이라는 ‘좁은’ 도시일지도 모른다. 그는 언제나 야심만만한 커리어우먼으로 직장과 가족 사이에서 바쁘다.
그런 그녀에게 눈 내리던 날 오후, 비보가 날아든다. 딸, 그레이스가 승마 도중 낙마하여 병원에 입원하였다는. 그날 아침 그레이스는 친구 쥬디스와 함께 말을 타고 눈 쌓인 산을 오르다가 낙마하여 한길로 굴러떨어진다. 그때 달려오던 대형 트레일러에 부딪혀 친구와 친구의 말 걸리버는 죽고, 그레이스는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는 사고를 만난다. 그레이스의 말 필그림은 그런 위기의 상황에서도 그레이스를 살리기 위해 돌진하는 차에 덤벼들다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그레이스가 입원한 병원에서 애니는 수의사로부터 필그림의 상처가 깊어 안락사 시켜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딸 그레이스도 남편 로버트도 수의사의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자신의 딸을 살리려했던 필그림의 행동에서 말과 인간과의 알 수 없는 소통이 있음을 알고 애니는 거부한다. 그리고 필그림의 상처를 회복시켜 보려 방법을 찾던 중 말의 부상과 정신적 충격을 치료해준다는 조마사, 호스 위스퍼러(속삭이는 사람)를 찾아낸다. 애니는 그에게 자신의 딸과 필그림의 상처를 치유하기로 결심하고 그가 있다는 몬태나주로 떠난다.
“정말 그 카우보이 놈에게로 간단 말이야?”
남편 로버트는 그게 또 은근히 걱정이었지만 언제나 단호하기만 한 아내의 결심을 바꿀 수 없다.
애니는 극도로 신경이 예민한 딸과 말 필그림을 싣고 머나먼 몬태나의 농장으로 향한다. 그 멀고먼 여정 중에도 애니와 그레이스는 끝임없이 갈등한다.
“너를 위해 이렇게 먼 길을 가는 엄마를 이해해 줄 수 없겠니?”
애니의 말에 그레이스는 더욱 분노한다.
“이해할 수 없어요. 제게 있어 엄마란 엄마 마음대로 하는 사람일 뿐이에요. 뭐든 엄마 마음대로 했잖아요!”
“나는 너를 아꼈어.”
“아끼셨다구요? 저는 뭐든 아는 척 하고, 뭐든 모르는게 없는 엄마가 싫어요.”
그레이스의 말에 애니는 눈물을 흘린다.
“밉다구요. 그런 엄마가 정말 밉다구요!”
엄마와 딸 사이엔 그런 보이지 않는 벽이 분명히 있었다. 그건 직장과 승진, 일의 성취감 뒤에 만들어진 그늘이었다.
그런 오랜 싸움 끝에 그들은 몬태나의 눈덮이 산록과 광활하게 펼쳐지는 대초원과 반짝이는 강물과 파란 하늘 그 아래를 한없이 달려간다. 그리고 그 끝에서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하고 거기에서 호스 위스퍼러 톰 부커(로버트 레드포드 분)를 만난다.
그레이스와 필그림은 그렇게 뉴욕에서 멀리 떨어진 이 ‘넓은’ 몬태나에 와 톰과 조우한다. 시설이 낡은 레이지 모텔에 투숙한 애니와 그레이스는 톰의 계수 덕분에 농장 별채에 머물게 된다.
톰은 애니의 부탁을 받아들인 뒤부터 필그림의 사람에 대한 두려운 공포심을 치유해 나간다. 조마사는 동물과 소통하여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는 애니멀 커뮤니케이터로 말을 길들이기보다는 말과의 영혼의 교감을 통해 막힌 문을 열게 하는 이다. 주로 따뜻한 시선, 또는 특별한 행동으로 말과 사람의 진정한 일체감을 유도한다.
톰은 마굿간에서, 강에서, 말 조련장에서 필그림과 만난다. 때로는 초원에서 단 둘이 만난다. 필그림의 두려움에 떠는 눈을 응시하며, 애정을 쏟으며 외로운 대화를 시작한다. 때로는 적대의 관계로, 때로는 불편한 관계로, 때로는 의미있는 관계로 서로의 마음이 열릴 때를 간절히 기다린다. 그런 오랜 묵언의 대화 끝에 필그림과 톰과의 거리는 천천히 좁혀진다. 톰이 지친 채 돌부리에 앉아 있을 때 필그림은 제 스스로 톰에게 다가와 그의 등허리에 호기심을 보이고, 냄새를 맡고, 얼굴을 부빈다. 전원의 한 부분처럼 편안해 보이는 톰은 톰대로 조마사 특유의 독특한 눈맞춤과 애정어린 스킨십을 통해 필그림과의 친밀감을 회복해 간다.
그때마다 이들 뒤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배경에서 눈을 뗄 수 없다. 몬태나의 눈덮인 산록들, 광활하게 펼쳐지는 대초원과 소떼들, 반짝이는 강물과 파랗게 뜨는 무지개. 그리고 진한 갈색의 말과 블루진에 흰색 카우보이 모자를 쓴 톰, 또한 몬태나 시골사람들의 힘든 일과 일 끝에서 즐기는 풍요로운 식사와 충분한 대화, 거침없는 춤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컨트리 노래들. 이런 전원의 삶에 그레이스는 물론 애니까지 깊은 행복감에 젖는다. 고향이랄 것도 없는 도회지 출신의 애니와 고향이 이토록 아름다운 몬태나 사람들.
그리고 가끔 눈에 들어오는 톰의, 손으로 하는 실 깊기 놀이. 처음엔 자신의 조카 조이와 하던 놀이가 점차 톰에게 관심을 보이는 지적 풍의 애니에게로 옮겨간다. 딸 그레이스와 필그림의 상처가 치유되어가는 걸 보며 톰에 대한 고마움이 차츰 사랑의 감정으로 바뀌어간다. 톰은 애니와 함께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고, 애니는 이혼한 톰의 옛 여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그렇게 해서 홀로 살고 있는 톰에 대한 연민에 빠진다.
톰과 애니의 관계가 점점 깊어갈 무렵, 아무 소식도 없이 애니의 남편 로버트가 농장에 나타난다. 그러자 톰은 애니와의 작별이 두려워 말을 산다는 핑계로 세리단으로 가버린다. 로버트는 어느 정도 치유된 가족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애니는 사랑에 빠진 톰 때문에 갈등에 빠진다.
“여보, 헤어져 있는 동안 당신이 그리웠다오.”
괴로워하는 아내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로버트는 뉴욕으로 돌아가 주기를 바란다. 로버트는 로버트대로 갈등이 있다. 아내 애니의 마음에 아내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톰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애들과 먼저 돌아가세요.”
지금 이 농장 안에 톰이 없다는 걸 안 애니는 그에 대한 그리움으로 농장을 떠날 수 없다. 결국 로버트는 아내를 두고 그레이스와 둘이 떠난다.
남편을 보낸 애니는 혼자 남아 톰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애니는 톰이 없는 빈 집을 서성이고 톰에 대한 연민으로 초원의 풀잎처럼 온통 마음이 흔들린다.
그 무렵, 애니가 떠났으리라 생각하고 돌아온 톰은 자신의 빈 집에서 뜻밖에도 혼자 남은 애니를 만난다. 격정을 못 이기고 둘은 껴안는다.
“가고 싶지 않았어요.”
애니가 울먹인다.
“나도 보내고 싶지 않았다오.”
그 순간, 톰의 얼굴엔 오래도록 잊고 살았던 사랑의 감정이 되살아난다.
“며칠 더 있고 싶었어요.”
애니가 눈물을 떨군다.
“그 후엔?”
톰이 짧게 되묻는다.
그 후엔 어떻게 해야 하나?
급기야 애니는 톰을 두고 차를 몰아 몬태나의 농장을 떠난다. 노을이 붉게 뜨는 초원으로 난 길을 따라 오래도록 떠나는 애니의 모습이 긴 작별의 여운으로 이어진다. 인생의 늦은 오후에 찾아온 사랑은 그렇게 쓸쓸한 빛깔로 사라진다. 서로의 가슴에 ‘절반의 사랑’을 영원히 남겨둔 채로.......
1998년작. 니콜라스 에반스의 소설 <속삭이는 사람>이 원작이며, 주연인 로버트 레트포드가 감독한 영화다. 그때 그의 나이 62세. 사랑에 대한 질문과 가족에 대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준, 몬태나의 대자연을 배경으로 펼쳐진 영화. 아역 스칼렛 요한슨의 내면적 연기는 물론 단역인 톰의 계수의 연기 또한 이 영화를 푸근하게 받쳐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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