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지평선을 본 적이 있나요?
권영상
오노 요코,
오노 요코를 생각하면 구속으로부터의 자유, 해방, 플라워 파워, 존 레논, 열정, 반전....... 그런 단어들이 떠오릅니다. 그런 단어들이 모두 그의 것이기도 하지만 또 어쩌면 그의 것이 아닐 수도 있지요. 한 작은 동양 여자가 영국 땅에서 사랑과 예술, 반전, 그리고 예술의 정치화를 목소리 높여 외친 경우도 드뭅니다. 어쩌면 그녀만큼 정치성 짙은 퍼포먼스를 즐긴 이도 없을 겁니다.
일생동안 겪었던
슬픔에 번호를 붙여 목록을 작성해보라.
번호가 늘어날 때마다 돌을 하나씩 쌓아보라.
슬프다고 생각될 때마다
돌을 하나씩 더 쌓으라.
목록을 불태우고 쌓인 돌의 아름다움을 평가해보라.
일생동안 누렸던
행복에 번호를 붙여 목록을 작성해보라.
번호가 늘어날 때마다 돌을 하나씩 쌓아보라.
행복하다고 느낄 때마다
돌을 하나씩 더 쌓으라.
쌓인 돌을
슬픔의 돌과 비교해보라.
<최근 지평선을 본 적이 있나요?>라는 전시회에 특별하게 제작한 <클리닝 피스- 아침햇살>이라는 설치물을 선보였는데 그때 당시 그의 신념입니다.
그녀는 그녀에게로 향하는 영국인들의 적대감을 이렇게 말했지요.
“나에 대한 반감은 적어도 세 종류입니다. 반아시아, 반페미니즘, 반자본주의적 반감이지요. 다들 이렇게 말해요. 저 늙은 여자를 봐라. 저 돈 많은 과부를 봐라.”
그가 그런 모욕을 뒤집어 쓴 건 존 레논을, 한 동양 여자에게 빼앗겼다는 군중들의 분노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트라팔가 광장 넬슨 동상 앞의 석조 사자상의 포장 이벤트 때문입니다. 그녀는 거기 전쟁과 남성의 권위를 상징하는 사자상을 천으로 싸서 묶은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반전 행위이며 일종의 예술적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 보수적인 영국인들은 이 일이 영국인의 자존심을 건드린 불경죄에 가까운 행동이라 보았습니다.
“동양 여자의 미친 짓이야!”
그들은 그렇게 요코를 향해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1967년 요코는 런던 리손 갤거리에서 두 번 째 전시회 <절반의 방>을 열었지요. 여기에 전시된 작품들은 말 그대로 절반짜리 물건들이었습니다. 반으로 자른 의자, 반으로 자른 구두, 모자, 라디오, 꽃병과 침대와 액자들...... 이들의 나머지 반쪽은 어디에 가 있을까요? 분명한 건 그 나머지 반쪽은 지금 여기에 없다는 겁니다. 이를테면 부재하는 존재이지요.
이 전시회가 있을 때 이미 요코는 딸과 헤어졌습니다. 물론 남편과도 별거 중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나머지 절반은 있으되 없는 부재의 상징인 셈이지요. 사람들은 겉 보기에 다들 버젓한 것 같지만 다들 뭔가 상실한 반쪽의 상태로 외롭거나 고독하거나 존재의 비극적 아픔을 숨기며 사는 거지요. 그게 바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고독의 근원이며 동시에 요코의 비극적 상황이기도 한 겁니다. 부재하는 그 나머지 반쪽은 누구인가요. 이미 알게 모르게 마음을 침식당하고 있는 존 레논이었습니다.
1968년 레논은 신시아와 이혼했고, 그 무렵 요코도 이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둘은 1969년 3월 29일 지브롤터에서 결혼했습니다. 그러니까 폴 메카트니가 비틀즈를 탈퇴하기 1년 전입니다.
“그들의 결혼은 전위예술과 팝음악의 유례없는 결합을 낳았다.”
당시의 문화 비평가들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 무렵 오노 요코은 음악과 미술에 빠져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하던 때였지요. 그는 ‘공기병’이라는 작품을 만들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부부라 해도 두 사람이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건 공기밖에 없다.”
어쩌면 <절반의 방>처럼 인간이란 그렇게 원초적으로 반쪽짜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함께 살면서 요코는 레논의 음악에 새로운 전환기를 만들어줍니다. 고아로 살다시피한 레논은 나이 많은 연상의 요코에게 자연스럽게 의존적이었지요. 그러면서도 정신적으로 고갈돼 가던 음악성을 요코의 동양정신, 일본성으로부터 자극을 받습니다.
요코는 <자유>,<비상>,<영원히 너의 다리를 들어라!> 등의 수십 편의 영화를 만듭니다. 주로 사슬을 벗어던진 여자의 영혼, 알몸의 여자 몸위로 파리가 기어다니는 걸로 잘 알려진 평화에 기여하는 작품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반쪽입니다. 나머지 반쪽과 함께 산다 해도 여전히 사람은 반쪽으로 살아가고 반쪽으로 남습니다.
지난 10월 7일입니다.
오노 요코를 찾아 다시 읽다가 우연히 그의 연인 존 레논의 생일이 한글날인 10월 9일인 걸 알았습니다. 이거 참 신기한 일치구나 하고 더 읽어나가다가 거기서 ‘일본 여성’을 다시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힘들게 살던 60년대 요코는 유럽에서 반아시아 정신과 맨몸으로 싸웠습니다. 그는 그의 음악 엘피판 자켓 표지에 레논과 함께 발가벗은 사진을 싣기도 했습니다. 유교식 교육과 풍습에 젖어살던 내게는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녀는 충격적이었습니다. 내가 그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를 처음 읽었을 때도 그런 충격에 빠져 한동안 우울했댔습니다.
며칠 전입니다. 우리나라엔 노벨문학상을 받을 작품이 없다는 어느 노 평론가의 글을 읽었습니다. 새 지평을 여는 뜨거운 열정이 누구에게나 더욱 절실한 때입니다.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빽’ (0) | 2012.10.16 |
---|---|
군중, 그 안에 섞인 나 (0) | 2012.10.15 |
조용하고 편안한 모습의 여인 (0) | 2012.10.10 |
오늘 하루 진심으로 겸손하고 싶다 (0) | 2012.10.09 |
마당에 심을 나무 다섯 그루 (0) | 2012.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