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군중, 그 안에 섞인 나

권영상 2012. 10. 15. 09:27

 

 

군중, 그 안에 섞인 나

권영상

 

 

 

 

나는 변덕스럽다. 죽 끓 듯 하지는 않지만 꽤 심한 편이다. 그런 까닭에 신념을 가진 분들이 부럽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그것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의 고집을 피우는 분들도 부럽다. 어떻게 인생 내내 신념을 꺾지 않고 줄기차게 살아낼 수 있을까. 신념 이외의 것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그 정신에 나는 놀란다.

그에 비하면 나는 신념이랄 게 없는 편이다. 이 정도 나이를 먹고도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예를 들면 어떤 때는 사람냄새 나지않는 첩첩 산중에 들어가 고요히 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때는 사람 물결 속에 들어가 피터지게 싸우며 살고 싶은 욕망으로 몸이 들끓을 때도 있다. 요 얼마전까지만 해도 조용한 산중살림이 그리워 차를 몰아 거처를 물색하러 다녔다.

 

그런데 오늘 아침이다. 아침 출근을 하러 전철을 타고 지하서울역에서 내려 인파에 떠밀리듯 출구를 향하여 걸어나갈 때다. 내 가슴이 기쁨으로 마구 들뛰었다. 북적대는 사람들, 그들과 섞이고, 풀리고, 밀고 밀리며 가는 중에 이게 사는가 싶은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역을 찾아가는 여행자들을 빼면 나처럼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사람이 없다. 처음엔 그런 내가 싫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내가 아직 쓸만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환승역인 교대역의 출퇴근 시간대는 나를 흥분케 한다. 환승을 하러 오고가는 그 엄청난 인파를 보거나 인파에 섞여있을 때면 몸이 벌떡벌떡 일어선다. 시멘트 벽을 밀어낼 것 같은 내부의 힘을 본다. 그러다가 흥분기가 가라앉기 시작하면 다시 내 귀가 열린다. 입에다 휴대폰을 대고 주고받는 거친 통화소리가 따스하게 들린다. 어찌보면 그 고래고래 지르는 통화소리도 이 시대를 힘버겁게 사는 나와 우리들의 이야기다. 목청 굵은 그 소리가 곧 삶에서 우러나오는 절박한 시이고, 소설이다. 오랜만에 반갑게 만난 이들이 옆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마구 떠드는 소리도 한참 지나 들으면 감동받을 대화들이다.

 

 

 

나는 언젠가부터 군중들의 소란스러운 말속에서 글감을 찾는다. 처음부터 그런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다. 전철이나 버스 말고 출근할 다른 길이 없었으니까 자연스럽게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글을 써 갈수록 느끼는 건데 문학은 자연을 이야기할 때가 아니라 사람을 이야기할 때 아름답고, 향기나고, 또 따뜻하다.

다 같이 손잡이에 매달려 같이 흔들리고, 같이 후덥한 실내 공기에 젖고, 같이 무차별적으로 쏟아내는 말의 소음을 들을 때 나는 분명해진다. 이들과 비슷한 신분의 비슷한 계층이라는 동질감에 빠져 행복하다. 그래서 내가 좀 힘들어도 내 앉은 자리를 나이 많은 이에게 양보한다. 어떨 때에 보면 전철이 만원이어도 노약자가 없으면 노약자석은 비어간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올 때 우리 사는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나는 그것만으로 가슴이 뛴다.

 

내게는 가끔, 나중, 은퇴를 하고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에 내려가 살 때 지금의 이 북적대는 인파가 그립지는 않을까, 에 대한 궁금함이 있다. 서울을 떠나지 않고는 제대로 살 수 없다고 하면서도 때로는 한적한 시골길을 걷다가 주저앉는 때가 있다. 나른한 정적감에 몸의 힘이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침 7시 30분대의 서울역이나 교대역의 인파속에 놓이면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진다. 내가 내게 주어진 시대를 온몸으로 살고 있구나 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또 어느 순간 죽끓 듯이 변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그게 뭐 나쁠 건 없다. 조용한 시골살이가 좋아 그렇게 살다보면 또 그게 싫을 때가 있을 테고, 그게 싫어 북적거리는 인파가 어느 날 그리웠을 때 그 속에 돌아와 살면 될 것이다.

나는 내가 초지일관하지 않아 좋다. 신념에 철저한 이념적 존재가 아니어서 좋다. 내 신념이란 것은 바람 앞에 나선 풀잎처럼 가벼이 흔들린다. 그게 뭐 나쁠 게 있겠는가. 김지하 시인의 시처럼 때로는 ‘벚꽃’이 좋다가 그게 싫어지면 또 ‘푸른 솔’이 좋아지는 게 사람의 본성이 아닐까. 사과맛을 즐기다가 다시 배맛을 즐기고, 고양이를 좋아하다가 개를 좋아하고, 한 때 미치도록 고흐를 사랑하다가 또 한 때는 민중미술가 캐태 콜비츠를 좋아하는 게 변덕이 죽 끓듯하는 나다.

   

인류를 사회적 인간과 고독한 인간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사회적 인간은 남들과 잘 어울리고 사람들 속에 섞여 그들과 소통하는 일을 즐기는 사람이고, 고독한 인간은 그걸 거부할 때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라 한다.

그러니까 내게는 이 두 가지 인류가 숨어사는 격이다. 때로 사람들과 합류하고 싶고, 때로 그들을 피해 멀리 떠나가 고독하게 살고 싶은..... 이런 정도의 변죽이라면 좀 끓어도 좋겠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사람이 늘 좋아지는 거리란 대체 얼마 정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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