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팥배나무 쉼터에서 만나는 개

권영상 2012. 10. 18. 10:28

 

팥배나무 쉼터에서 만나는 개

권영상

 

 

 

 

여름이 한창이던 8월의 어느 날 일이다.

가끔 간단한 운동을 하러 근처 우면산 중턱 팥배나무 쉼터에 올랐다. 몇 달 전부터 엉치가 좀 불편했다. 다행히 여름 방학이라 나는 꾸준히 올랐다. 거기서 나는 지금 말하려는 개 한 마리를 만났다. 애완견보다는 좀 크고 중개보다는 좀 작은 한 눈에 보기에 깨끗하고 단정한 흰둥이었다.

그는 누굴 찾으러 온 사람 같았다. 그늘에 앉았다가도 팥배나무 쉼터를 지나는 이들을 살피거나 또는 몇 걸음 따라가 보다 다시 돌아오곤 했다. 쉼터는 산아랫마을에서 꽤 먼 거리에 있다. 나는 그 쉼터에서 몇 번이나 개를 봤다. 어떤 때는 나보다 먼저 와 쉼터 팥배나무 그늘에 앉아 있거나, 아니면 산비탈을 타고 불쑥 올라오기도 했다.

 

 

그러고 며칠 뒤인가 나는 그 쉼터 어름에서 개를 찾고 있는 가족을 만났다. 젊은 아버지와 아들과 어린 딸아이였다. 손에 개의 목줄을 쥐고 산을 두리번거리는 게 한눈에 보기에도 잃어버린 개를 찾는 모습이었다.

“개를 잃어버렸나요?”

내 물음에 그들은 구세주를 만났다는 듯 내게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준비해온 사진을 내 앞에 내밀었다. 맞았다. 내가 쭉 보아오던 그 흰둥이 개였다. 나는 내가 보던 대로 이쪽 근방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다고 일러주었다. 그들은 내 말만으로도 벌써 개를 다 찾은 것만큼이나 기뻐했다. 나는 그들을 두고는 산을 올랐다.

‘무슨 연락처라도 달래볼 걸 그랬나.’

한참을 오르다 생각해 보니 그걸 못 물어본 게 아쉬웠다.

  

 

그 후, 나는 몇 번인가 우면산을 올랐는데 흰둥이를 보지 못했다. 주인을 만났겠지, 했다. 그런데 그 얼마 뒤 팥배나무 쉼터에서 다시 그 흰둥이를 만났다.

“아니, 그때 네 주인을 못 만났니?”

나는 내 쪽으로 어슬렁거리며 오는 그에게 물었다.

나를 쳐다보는 흰둥이의 눈이 슬퍼 보였다. 나도 집에서 애완견을 키우니까 개의 감정표현을 대충 안다. 나를 한참 울먹이듯 쳐다보던 흰둥이가 그늘 쪽으로 가 눕는다. 여기 이 산중 어디에 거처를 만들어 여태껏 살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흰둥이를 본 지 벌써 열흘도 더 되었는데 그는 이 나무와 풀뿐인 산중에서 뭘 먹고 살며, 가끔씩 쏟아지는 폭우에 어떻게 견뎌내는지 그게 가여웠다. 배를 유심히 보지만 그렇게 훌쭉한 편은 아니다. 훌쭉하지 않다면 뭔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산속을 헤매어 다녔을 테고 그러려면 상처라도 날 법 한데 털빛이 하얀 그대로다. 흰둥이가 나름대로 깔끔한 성질이라 그런지.

   

 

그러고 또 며칠이 지난 뒤다. 그 개에 대해 모든 걸 잊을만 한 때에 또 팥배나무 쉼터에서 흰둥이를 만났다. 그는 늘 이 언저리에 와 주인을 기다리는 듯 했다. 어쩌면 그가 주인과 헤어진 장소가 이 팥배나무 근처인 듯 싶었다. 그는 이 장소 외에 주인을 찾아갈 그 어떤 방향도 알지 못한다. 오직 이곳! 그가 확실히 기억하는 곳은 이 세상에서 이곳뿐. 그런 까닭에 그는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늘 여기에 와 주인을 기다리는 것이 틀림없다.

 

대충 헤아려 봐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개의 털빛은 그대로 하얗지만 가슴과 허벅지에 털이 덥수룩하게 길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동그랗고 까만 눈과 눈 주위가 붉었다. 처음엔 허기지거나 피곤해서 그런가 했는데 책을 뒤져 본 바로는 기생충에 감염된 증세였다. 배가 고파 아무거나 먹다가 보니 그렇게 감염된 모양이다. 흰둥이는 이제 그늘이 싫은 지 햇빛 드는 여뀌풀밭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다. 그러면서 오가는 사람의 기척이 있으면 누운 채 고개를 들어보다가는 힘없이 그냥 고개를 떨어뜨리곤 했다.

 

저렇게 하염없이 제 주인을 기다리다 끝내 제 주인을 만날 수는 있을까.

나는 흰둥이를 볼 때마다 그런 목마를 만큼의 막연한 기다림을 생각해 본다. 나는 여기서 단 한번 외에 개를 찾던 주인을 본 적이 없다. 한 달이나 지났으니 어쩌면 그들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 흰둥이를 벌써 잊었을지 모른다. 그들도 한 때는 잃어버린 개 때문에 몹시 괴롭고 심란했을 거다. 그러나 한 주일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고 한달이 지나면서 개에 대한 기억들이 지워졌을 것이다. 그들이 일부러 지운 게 아니라 지나간 세월과 바쁘게 살아내야 하는 삶이 그들 머리의 기억을 지웠을 것이다.

 

나쁜 생각일지 모르지만 설령 그 주인이 이 산중에서 우연히 이 개를 만난다 해도 이런 몰골의 개를 데려갈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애써 외면하고 가버릴지 모른다. 영양실조에 걸려 덩치가 엉성한 모습을, 충에 감염되어 붉으레한 눈꼽 낀 모습을 보고 선뜻 데려가 줄까.

그러고 말이다. 저기 여뀌풀밭에 힘없이 누운 개는 그런 일쯤 생각이나 하고 저렇게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건지. 나는 나무 벤치에 앉아 흰둥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주인도 개도 한 때는 서로 따르고, 귀애해 주고, 사랑하고, 식구처럼 살았겠다. 한 방에서, 때로는 한 침대에서, 같이 호흡하고, 같이 웃고 울고, 서로의 감정에 충실하며 살았겠다. 서로 없으면 못 살 것처럼.

   

 

 

 

그런데 지금 어느 한쪽은 이곳을 떠나지 못한 채 간절히 상대를 기다리며 굶주림에 떨고 있고, 또 어느 한 쪽은 그런 사실도 모른 채 이미 한 때 사랑했던 존재를 잊고 있을 것을 생각해 본다. 개가 떠나지 못하는 것은 한 때의 행복을 아직도 분명히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허기지고, 비에 몸이 젖고, 찬이슬에 떤다 해도 만날 때를 위해 견뎌낸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어쩌면 이 산중에 추위가 오고 눈이 내리면 개는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서 눈을 감고 말겠다. 눈을 맞으며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그는 주인이 와주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런 저쪽에선 이미 자신에 대한 모든 기억을 다 잊고 있는데......

이런 어긋남은 또 얼마나 쓸쓸한가.

 

 

빵이라도 주어보려고 가끔 들고 올라가지만 그럴 때에는 또 어느 산중을 헤매는지 보이지 않는다. 방학도 끝나고 벌써 시월 중순이다. 자켓 속에 반팔 티셔츠를 입기엔 서늘한 날씨다. 아직도 흰둥이는 주인을 기다리며 팥배나무 쉼터를 어슬렁거리고 있는지....... 어느 한쪽의 기억은 아직도 역사의 기록처럼 선명한데 어느 한쪽은 이미 다 잊어버린 이 모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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