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여름의 끝자락에서 만난 이창건 시인

권영상 2012. 8. 24. 08:48

 

 

여름의 끝자락에서 만난 이창건 시인

 

권영상

 

 

“여보, 전화 해 줘요. 이창건 시인 전화.”

동네 우면산에 갔다 돌아오자 아내가 황급히 내 휴대폰을 건넨다. 나를 만나려고 전철을 타고 오는 중이라 했다. 갑작스런 일이다. 방학이니 한번 만나자는 전화와 문자는 그간 몇 번 주고 받았다. 내가 강릉으로 떠나려 할 때 전화를 받았고, 내가 이형에게 전화를 걸었을 땐 춘천에 볼 일이 있어 간다고 했다. 그러면 ‘한번 시간 내어 봅시다’ 그런 문자만 일없이 서로 주고 받았다. 그러다가 요 며칠 전엔 개학을 했느냐는 문자를 또 받았다. 3일 남은 방학에 다시 만나기가 서로 어려울 것 같아 남은 방학 잘 쉬시라고 문자를 보냈다.

방학을 해도 서로 만나기 어렵다. 이창건 시인에겐 건강이 좋지 않으신 아내가 있다. 그러니 쉽게 아내 곁의 자리를 비우는 일도 힘들다.

 

 

나는 휴대폰을 받아들고 ‘통화’를 눌렀다. 불광동에서 탔을 테니 빨리 와야 충무로쯤이겠지, 했다. 그런데 벌써 양재역이란다. 나는 남부터미널역으로 한 역 되돌아오라 하고는 발길을 돌려 집을 나갔다. 우리가 이 오랜, ‘한번 만나자’는 데에는 다른 속뜻이 있다. 말하기 어렵지만 추어탕을 한번 먹자는 바가 숨어있었다. 저번, 내가 다니는 청계산 주말농장 근처에 그런 음식점이 있다는 말을 한 걸 이형은 또 잊지 않았나 보다. 근데 거길 가려면 차를 가져가야 하고, 그러면 술 ‘한 잔’이 어렵다.

 

 

“아, 권형!”

국제전자센터 마당에 이르자, 이형이 내 앞에 불쑥 다가왔다. 여름 양복 차림이다. 악수를 했다. 내 손에 쥐여진 이 형의 손이 종잇장처럼 가볍다. 추어탕의 거리가 여기서 좀 멀다는 내 말을 듣자, 그럼 가까운 우면산에 가자고 했다. 마침 내 손엔 산에서 돌아온 스틱이 있었다. 우리는 담쟁이넝쿨로 잘 어우러진 남부터미널 서쪽 담장을 끼고 예술의 전당을 향했다. 그 너머가 우면산이다. 전당 뒷마당에서 연못으로 흘러내리는 계곡물을 보자 우리는 동시에 소리쳤다.

“계곡물에 발이나 담급시다!”

우리는 연못가의 바윗돌을 넘어 계곡물이 흐르는 골짜기 으슥한 데로 올라갔다. 장맛비 끝이라 물은 많았고, 앉을 바위도 마침맞게 있었다.

 

 

이형과 나는 바위에 앉자마자 양말을 벗었다. 그리고 흘러내리는 푸짐한 산골짝물에 발을 담갔다. 시원하다. 우면산을 20여년 올랐지만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보기는 처음이다. 더구나 여기가 서울임에랴.

우리는 이렇게 문득 만났다.

 

두루미 떼가 겨울을 나려고

따뜻한 땅을 찾아왔다.

이곳에도 바람과 눈은 있단다.

그래 잘 지내다 가거라.

잠도 춥지 않게 자고

배고프지 않게 먹고

만약 짝이 아프면 다 낫게 해서

같이 고향으로 돌아가거라.

나도 너희들처럼 철새란다.

 

이형의 시 ‘철새’다.

정말 철새처럼 이형은 아무 예고도 없이 문득 왔다. 오다가 내가 집에 없으면 그냥 오렌지 주스나 한잔 사먹고 돌아가려 했다는 거다. 저번 이형이 동시집 <씨앗>을 냈을 때 내가 이 형이 사는 불광동에 간 적이 있었다. 그 보답을 하려고 이번에 동시집 <엄마와 털실뭉치>를 내가 내자 우리 동네로 왔다. 꼭 그 보갚음만으로 온 게 아님을 나도 안다. 이 복잡한 서울에서 서로 마음을 기대며 살 사람이 몇 없다. 이형도 그렇다.

 

 

 

우리는 둘 다 퇴직이 멀지 않은 시기에 와 있다. 언젠가 그 외로운 때를 위해 내가 안성 어디쯤에 내려가 살 집 하나를 마련했다 하자 이형이 그랬다.

“나도 한 칸짜리 집 하나를 짓고 싶어.”

한 칸을 지어서 뭘 할 거냐고 물었을 때 잠시 버릇대로 머뭇거리던 이형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이 들어 집이 없는 신부님들을 하룻밤씩 재워드릴까 해서.”

한 방에서 밥상을 차려 같이 밥을 먹고, 밤이 깊어지면 요 깔고 이불 덮고 그렇게 한 방에서 자고. 그렇게 자다가 잠이 안 오면 컴컴한 방에 누운 채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고.... 그러려면 방이 한 칸이어야 한다는 거다.

 

 

나의 안성 집이 거실 하나에 방이 두 칸이라 한 내가 좀 무안했다. 나는 나 한 몸 좋자고 집을 얻었고, 이 형은 집이 없는 이를 위해 단칸집을 짓겠다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형의 내면엔 ‘철새’의식이 있다. 우리도 언젠가 철새들처럼 이곳을 떠난다는. 그런 존재들인데 무슨 큰집이 필요하고, 무슨 번드르르한 재물과 위세가 필요할까 하는. 아픈 아내와 오래도록 사는 한 사나이의 마음에 물든 외로운 얼룩이랄까.

 

 

골짝물은, 이 땅에 와 동시를 쓰는 이 형과 내 앞을 가파르게 흘러간다. 그리고 우리는 철새처럼 그 곁에 잠시 머물러 있다. 서로의 시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우리 문학판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고, 그리고 살아갈 날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나는 내년 2월이면 명예퇴직을 하고, 이형은 그 해 8월에 퇴직을 한다. 이 형은 나보다 한 살이 많다. 우리들은 다 60대다.

무던히도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하며, 글을 쓰며, 가정사에 골몰하며 여기까지 왔다.

 

“퇴직하면 권형은 안성으로 간댔지?”

나는 돌멩이 하날 물 속에 던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형은 어떡할 거야?”

내가 물었다.

“나는 춘천으로 갈까봐.”

이 형도 물속에 나뭇가지 하날 던졌다.

나는 골짝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안성과 춘천의 거리를 가늠했다.

“참 머네.”

내가 그랬다.

“서울을 떠나도 서로 오고가며 살자구.”

인생의 쓸쓸함을 먼저 겪은 이형이 그랬다.

 

 

고물 고물 고물 고물

개미가 가는 길에

돌멩이를 치워주는

아이의 작은 손을 보았네.

내가 만약

그 아이와 함께 길을 간다면

그 길에 놓인 돌멩이 걷어주는

나도 작은 손이 되겠네.

 

이 ‘개미가 가는 길에’처럼 이 형은 세상의 낮은 곳을 찬찬히 보는 마음이 있다. 그의 삶은 마치 기도하듯 늘 간절하고 절박하다.

“자, 일어나 막걸리나 한잔 하러갑시다.”

내가 일어섰다.

“그래요.”

이형도 일어섰다.

 

이형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젖은 발을 닦았다. 나는 조용히 그의 손에 들린 손수건을 봤다. 아직도 양복에 손수건을 넣어가지고 다니는 사람. 남의 아픔을 나의 눈물로 받아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나도 대충 돌부리에 물기를 찍어내고는 양말을 신었다.

 

 

그길로 내려와 예술의 전당 앞 백련옥에 들어가 콩국수에 서울막걸리 두 병을 마셨다. 그러고 그냥 헤어지기 싫어 커피점에 들어가 나는 에스프레소를, 속이 안 좋다는 이 형은 오렌지주스를 마셨다.

“졸지 말고 조심해 잘 가요.”

남부터미널 역 지하에서 나는 손을 내밀었다.

“권형, 우리 의 변하지 맙시다.”

악수를 하고 이형이 돌아섰다.

나도 돌아섰다.

 

그 뜨겁던 여름도 한풀 꺾인 8월 16일.

휴대폰을 열어보니 오후 2시 43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