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면산에서 만나는 나무들
권영상
안녕하세요? 수녀님.
너무도 오랜만에 우면산에 갔댔습니다.
지난 주말, 오대산 진고개에서 본 가을 단풍과는 달랐지만 가을이 꽤 깊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느팃잎과 팥배나뭇잎,은사시와 물박달나뭇잎은 벌써 많이 지고, 또 남아있다 해야 물빛이 빠져버렸습니다.
우면산 오른지 며칠 된 것 같아요.
저도 몸이 안 좋았어요. 오늘은 일어나 아침을 먹고 또 소파에 누워 잠시 잤습니다. 피곤해요. 저번 주 강릉 갔다오고, 또 며칠씩이나 술을 마셔서 그런지 입술이 트고, 혀에 바늘이 돋았어요.
한잠을 자고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두툼하게 입고 산엘 올랐는데 오르고 보니 더웠습니다. 더운 중에도 산이 내뿜는 그 서늘한 기운이 몸을 좀 추슬러줍니다. 세상에서 지쳐온 몸을 이렇게 우면산이 추슬러 줍니다. 이러니 산에 발을 안 디딜 수가 없네요.
여름 동안에 비에 쓰러졌던 나무들을 구청에서 그랬을 테지요.
모두 잘라냈습니다.
아카시나무들은 뿌리를 깊이 박지 못하는 탓인지 장마만 오면 픽픽 쓰러집니다. 그래서 길을 틀어막거나 아니면 다른 이웃 나무에 기대어 누워버립니다.
오늘은 그 아카시나무의 톱으로 베어낸 밑둥이를 유심히 보았습니다. 나이테가 수북한 자리를 만져 보기도 하고, 코를 대어 나무내음을 맡아 보기도 했습니다. 베어낸지 오래되긴 해도 아카시나무 특유의 냄새가 은은히 났습니다. 아카시나무 내음은 약간 비빗합니다. 생선 비린 냄새 말이지요.
그 곁에 함께 쓰러진 팥배나무 몸에서는 풀냄새가 나네요.
바랭이나 잔디를 손 끝으로 뜯어 맡아보던 그 내음입니다.
지난해 여름이었어요.
두어 아름드리 은사시가 쓰러지면서 곁에 있는 단풍나무를 내리쳤어요. 나이를 많이 먹고 쓰러진 은사시나무야 그렇다쳐도 허리가 부러진 젊은 단풍나무를 그냥 지나치기가 미안했어요. 가까이 다가가 보니 단풍나무 찢어진 자리에서 그때도 비릿한 나무내가 진동했어요. 마치 고기잡이에서 갓 돌아온 어선에서 나는 냄새 같았어요. 그 비릿한 냄새가 몸을 팽팽하게 추슬러주는 듯 했어요.
단풍나무는 수피가 초록입니다. 정말 눈부실만큼 아름다운 초록입니다. 반듯하게 몇 도막 잘라 집에 가지고 와 불빛에 보니 목질에 푸른 빛이 은은히 돌았습니다. 제 방 벽에다 세워두었는데 가끔 보아도 참 호감이 가는 나무입니다.
근데 목질이 아름답기로 한다면야 오리나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네요.
산에 오르다 보면 구청 인부들이 가끔 오리나무를 잘라 나무계단을 만들거나 그럽니다. 어느 비오는 날, 나는 그 오리나무 베어낸 자국을 보고 혀를 내둘렀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습니다. 비에 젖은 속살이 빨갰습니다. 주홍에 가까운 빛깔이었어요. 젖은 황토빛, 아시지요? 그 빛이었습니다. 그렇게 빨간 속살을 내놓고 베어진 채 누워있는 걸 처음 보았습니다. 오리나무라는 건 본디 볼 품이 없습니다. 나무의 외모도 그렇지만 목질이 약해 아무 짝에도 쓸 데가 없지요. 그저 농가의 군불을 때는 화목으로나 마땅할까요. 그런 허드레 나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안에 그처럼 기특한 빛을 감추고 있는 걸 처음 보았습니다.
산을 내려오면서 보니 베어진 나무가 한 둘이 아닙니다
그들이 숲을 이루고 살던 공간이 텅 비었습니다. 저 높직한 하늘 한 자리가 비어있다는 것이 참 허전했습니다. 나무는 쓰러지면서 그렇게 살던 자리마저 다 내놓습니다. 그러나 저 빈자리도 또 세월이 가면 젊고 늠름한 다른 나무들로 메워질 테지요.
제가 가는 이 길 앞에 겨울이 있기 때문인가요.
괜히 그렇게 무거운 생각이 가슴에 들어왔습니다.
나무에 관한 공부를 좀 해봤으면 싶습니다.
이 서울 안에서 그래도 이만한 나무들과 함께 살 수 있다는 게 고맙습니다.
수녀원 가까운데도 산이 있다고 하셨지요?
요즈음 같은 날엔 산길 걷기가 좋습니다.
산에는 그렇지 않으리라 했는데, 산에도 인간의 세상처럼 생로병사가 있음을 배웁니다.
늘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식사는 잘 하시나요?
이제 조금 있으면 저녁이 올 시간입니다.
창밖 아파트 꼭대기에 한 움큼 저녁햇살이 간신히 걸려 있습니다.
행복한 저녁 되시길 빕니다.
그럼,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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