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아동문학회 여름세미나>
상상의 힘과 스토리텔링
-삼국유사를 중심으로
(발표자, 권영상)
1. 일연, 어떤 분인가
일연은 고려 21대 희종 2년(1206) 경상도 경산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꿈에 어머니의 몸에 사흘 동안 해가 비춘 뒤 태어났다고 한다.
이 해는 칭기즈칸이 몽골제국을 건설한 해이며, 일연은 태어나면서부터 고려 무신정권(1170년-1270년)과 몽골 침입(1231년-1270년)의 한 복판에서 살았다. 9살에 현 광주광역시 인근 무량사로 출가하였으며, 14살에 설악산 진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22살에 승과에 합격하고 대구 비슬산을 중심으로 수행하였다.
78세에 국사가 되었고, 이듬해 왕의 곁을 물러나 지금의 군위에 있는 인각사로 내려왔다. 군위에는 아들을 출가시킨 뒤 홀로 70년을 사신 노모가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해,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일연은 자신 사후에 세워질 부도탑 자리를 정하고 난 뒤 말했다고 한다. 저녁에 인각사에 불을 켜면 그 불빛이 내 부도탑을 비치고, 그 불빛이 다시 어머니 묘소의 묘비를 비치고, 그 불빛이 다시 인각사로 돌아오도록 하고 싶다고.
일연의 빼어난 상상과 연출의 힘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일연은 어머니 사후 7년 동안 인각사에 머물며 <삼국유사>를 완성하였고, 1289년 84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일생동안 삼국유사 외 77권이라는 다량의 저술을 남긴 저술가이며 고승이다.
2. 삼국유사와 스토리텔링
스토리텔링이란,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를 보다 흥미있게 전달하는 행위이다.
이미 우리는 어린 시절, 할머니의 스토리텔링을 통해 앞선 세대의 이야기 문화를 접하며 성장했다.
몰입과 감동, 환상과 상상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우리민족의 이야기 텍스트 중에 삼국유사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치고 삼국사기는 몰라도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쯤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 삼국유사는 진작부터 민간과 친근한 책이었다.
모두 3권 1책으로 일연 사후 고려 충렬왕 7년(1281)에 편찬 되었고, 학자들에 따라 ‘대안사서’라고도 하지만 달리 ‘이야기의 보물창고’이기도 하다.
국조 단군, 북부여, 발해, 가락, 그리고 고구려 백제 신라 등 당대 사람들의 세계를 만나고 이해하는 방식과 삶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 콘텐츠는 비록 그 옛날의 것이기도 하지만 다시 살려낸다면 오늘의 우리 뿐 아니라 세계인도 충분히 감동시킬 수 있는 흥미로운 서사문학이다.
상설 뮤지컬 ‘월명’은 2020년 5월 경주엑스포와 함께 정동극장에서 선보인 후 무려 7개월간 1만여 명의 관람객을 공연장으로 이끌어 들였다. ‘월명’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승려 월명사의 향가 ‘도솔가’에 현대적 요소를 가미한 뮤지컬이다. 현대인에게도 충분이 몰입과 감동과 재미를 선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삼국유사 속 수많은 콘텐츠들은 과거의 이야기이면서 또한 어떻게 재해석 하느냐에 따라 현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삼국유사 속 이야기들이 오늘 우리에게도 호응을 받는 이유는 뭘까.
당연히 마음을 끌어당길 만큼 재미있고, 달콤하고, 때로는 놀랍고 감동적인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그렇게 만들어진 배경엔 우리 민족의 스토리텔링 솜씨도 한몫 했을 것으로 본다. 우리의 드라마, 영화, 대중가요, 웹툰, 애니메이션, 뮤지컬이 해외에서 각광 받는 이유도 어쩌면 한국인의 독특한 스토리텔링 능력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삼국유사의 수많은 이야기들은 분명 당시 사람들이 생산해낸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가 있는 곳을 찾아가 이야기를 모으고 재구성하여 문자화한 것은 일연이다. 일연의 스토리텔링 기법을 지면 관계상 삼국유사에서 3편만 골라 조명하고자 한다.
3. 삼국유사 속 스토리텔링 뜯어보기
삼국사기가 왕 중심의 역사서라면 일연의 삼국유사는 역사서가 가지는 빈자리를 채우는, 역사서이면서도 역사서가 아닌 대안사서다.
왕의 역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이야기를 따라가고 있다. 그런 까닭에 이야기가 있다면 그가 왕이든 화랑이든 평민이든 승려든 아녀자든 그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책의 체제 역시 시대 순을 무시하고 이야기의 주제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야기쟁기꾼 일연은 고승 국사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세계관과 학식이 가장 풍부한 엘리트다. 그러므로 고려가 보유한 고문서적은 물론 고려를 내왕하던 외국인들, 인도나 중국으로 유학 간 고려 지식인들이 가져온 책 속의 첨단 정보나 이야기 문화를 어느 정도 섭렵했을 것이라는 점과 그것이 삼국유사 집필에 어느 정도 작용했으리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본질은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역사적 팩트를 바탕으로 은유와 상징 같은 고도의 문학적 기법으로 이야기의 이면을 숨기는 다층적 방식을 이용했다. 그러므로 삼국유사에 실린 이야기들은 까면 깔수록 흥미있고, 벗기면 벗길수록 결국 팩트에 가 닿는다는 점에서 허구의 문학과 분명히 다르면서 재미있다.
1) 문희가 오줌 꿈을 사다
삼국유사 기이 제 1편 ‘태종 춘추전’에 나오는 팩트를 요약하면 이렇다.
김유신이 신분상승을 위해 누이동생을 춘추와 결혼시키다. 그런데 그 과정이 험난했다.
일연은 이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취합해 매우 흥미있게 구성해 냈다.
보희가 꿈에 서악에 올라 오줌을 누었는데 그 오줌이 경주에 가득 찼다. 그 이야기를 듣자, 동생 문희가 비단을 주고 꿈을 사다.
본문 앞에 놓인 이 짤막한 에피소드는 암시와 반전을 위한 복선을 숨기고 있다.
이 꿈은 장차 꿈의 주인이 신분이 높은 인물이 될 것을 암시하고 있으며, 동생 문희가 그 꿈을 삼으로서 이야기의 흐름을 뒤집게 되는 복선의 에피소드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춘추와의 혼사가 왜 첫째누이인 보희가 아니라 둘째인 문희와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일종의 해명을 위한 단락이 아닌가 싶다. 나중에 일연 스님이 첨가했을 듯.
어쨌거나 보희의 오줌 이야기는 도발적이며 발칙하기까지 하다.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또한 그 꿈이 대체 어떤 꿈이기에 비단을 주고 샀을까 하는 궁금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축국으로 유신이 춘추의 옷고름을 떼는 일이 이 이야기의 발단이다.
그 후 펼쳐지는 전개는 ‘옷고름’을 다는 문제로 보희는 오빠 유신과 갈등하고, 결국 꿈을 산 문희가 그 옷고름을 달아준다. 비록 몰락했지만 명색이 가락국의 공주인데 이미 보라궁주와 결혼하여 딸까지 있는 춘추와 엮여지는 일에 보희는 마뜩찮아 한다. 그런 망설임을 보이는 언니 보희를 밀치고 차별 받고 사느니 가문의 신분 상승을 위해 춘추가 머무는 방에 들어가 옷고름을 달기까지 겪게 되는 이들의 내적 외적 갈등을 상상할 수 있는 흥미로운 단계이다.
문희가 언니의 꿈을 사는 에피소드가 없었다면 이 부분에서 문희는 언니의 기회를 가로채는 매우 영악한 여자로 보일 수 있다. 그 점을 감추기 위해 앞 부분에서 꿈을 판 언니를 좀 어리석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위기는, 처녀인 문희가 임신을 한다.
이 이야기의 절정은, 선덕여왕의 남산 행차 시 여왕이 보란 듯 유신은 뜰에 장작불을 피워놓고 임신한 누이를 불 태워 죽이려고 연기와 불길을 솟구쳐 올리는 연기(연출)의 장면이다.
사실을 알게 된 선덕여왕의 명으로 문희는 살아나고 춘추와 결혼하는 것이 이 사건의 결말이다.
김유신 각본 김유신 연출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위험한 연극이다.
위험한 연극인 까닭은 화형이라는 극적 장면도 위험하지만 등장인물들이 모두 실명이란 점에서 더욱 그렇다. 춘추의 옷고름을 계략적으로 떼는 유신, 춘추의 잠자리 요구를 거부하는 보희, 그리고 문희의 혼전 임신 등의 내용 모두 대놓고 공개하기 곤란한 은밀한 사생활들이다. 이 점이 더욱 사건의 위기와 긴장감을 높여가고 있다.
가장 큰 갈등 요소는 문희의 혼전 임신과 이것을 알게 된 유신의 분노다. 그리고 이 사정을 알고 가슴 조이며 떨고 있었을 춘추와 유신의 신분상승에 대한 욕망이 화형이라는 극단적 방식으로 치달아간다. 결국 이 복합적 갈등은 선덕여왕의 명으로 해소된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반전과 반전, 긴장과 긴장의 짜릿한 즐거움은 다름아닌 이야기의 탄탄한 구성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신라와 병합은 되었으나 여전히 차별받는 가락국 귀족의 눈물겨운 신분상승의 고충을 암암리에 그리고 있다. 이것은 당대 약자(몰락한 가야인)가 승리하는 멋진 감동 스토리이며, 낮은 신분의 민중들이라면 누구나 아낌없이 박수를 보낼, 춘향전과 같은 해피엔딩의 결말을 가지고 있다.
몽골의 침입으로 만신창이가 된 민중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삶을 일으켜 세우려는 국사로서 의 일연의 의도가 얼핏 엿보인다.
2) 바다에서 사람이 걸어 나오다
처용에 관한 정보는 삼국사기에 이렇게 실려 있다.
헌강왕 5년(879년) 3월에 왕이 동국의 주와 군을 순행할 때 어디서 온지 모르는 네 사람이 어가 앞에 나타나 가무를 하였는데, 그 모양이 해괴하고 의관이 괴이하여 당시 사람들이 산과 바다의 정령이라 하였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 권 제2 편 ‘처용랑 망해사’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나라가 태평을 누리자 왕이 재위 5년에 개운포 바닷가로 놀이를 나갔다가 장차 돌아올 때 물가에서 쉬었는데 홀연히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덮이면서 갑자기 천지가 어두워졌다. 괴이히 여겨 물으니 일관이 말하되 이것은 동해 용왕의 짓이므로 좋은 일을 하여 풀 것이라 하였다. 이에 왕이 용을 위해 절을 짓도록 명한 즉 바로 안개와 구름이 걷혔다. 그러므로 이 포구를 개운포라 했다. 기분이 좋아진 용왕이 아들 일곱을 데리고 나와 왕의 덕을 찬양하고 춤을 추며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왕을 따라오니 그가 곧 처용이다.
앞의 글과 뒤의 글은 읽는 맛도 다르거니와 전개 방식도 다르다.
앞의 글은 사기이다. 자신의 생각보다는 보고 들은 사실 중심으로 기록하였다. 마치 당대 어느 날의 신문 기사를 읽는 듯한 건조체 문장이다.
뒤의 글은 사건의 골격에 흥미로운 이야기의 옷을 입혀 처용이라는 전혀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낸다.
이 이야기는 민간에 널리 퍼져 전해오다가 일연에 의해 문자화 되었다. 삼국유사에 실린 이 이야기가 어쩌면 당시 민중들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 그대로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산만한 이런 저런 이야기 도막을 일연이 재구성하여 정리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일연은 이 사건을 상당히 풍부한 상상력으로 가공하고 있다. 삼국사기와 달리 처용의 일행을 ‘용왕의 아들들’이라 했고, 이들은 왕의 덕을 찬양하고 음악을 연주하였다로 서술하고 있다. 또한 그들을 ‘해괴하고 괴이한’ 인물이 아닌 ‘신분이 높고 교양있고 늠름한 인물들’로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주인공을 부정적으로 그리기보다 친근하고 멋있고 교양있는 인물로 그려낼 때 이야기는 더욱 흥미로워지고, 인물에 대한 몰입도도 높아진다. 그러기에 멋진 주인공의 설정이야말로 이야기의 성패를 결정짓는 척도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의 도입부는 구체적인 지명인 개운포(이 이름은 이야기 후반에 만들어졌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구체적 공간이나 이름은 생생한 현장감을 주기 위한, 필수적인 스토리텔링 기법이다. 그냥 ‘옛날에 옛날에 어느 산골에 한 나무꾼이 살았는데,’ 하는 방식과 전혀 다르다. 그것은 소녀가 ‘양평’으로 이사 갔다는 소설 ‘소나기’ 속의 실제 지명 때문에 이 소설이 실제의 이야기일 거라는 착각을 주는 효과와 같다.
사건의 시작은 갑작스러운 구름과 안개가 자욱이 끼면서 천지가 어두워진다. 삼국시대쯤의 천기변화는 당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길만한 큰 사건이다. 귀신을 등장시키기 위해 갑자기 검은 바람이 촛불을 꺼뜨리는 것과 같은 전조로 하얀 안개가 끼는 걸로 보아 장차 좋은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왕은 일관의 도움으로 동해 용왕을 위해 절을 짓는다. 그러자 천지를 어둡게 하던 안개는 사라지고 바다에서 일곱 명의 사내들이 걸어 나온다.
놀라운 상상력이다. 마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낯설게 하기’ 기법인 데페이즈망에 닿아있다. 비 내리는 하늘에서 빗방울이 아니라 중절모를 쓴 남자들이 내려오는 작품 ‘골롱드’와 푸른 바다에서 일곱 명의 사내들이 걸어 나오는 이 장면은 독자들에게 신선하고 낯선 충격을 주기에 충분하다.
하이데거는 익숙한 게 아니라 낯섦에 직면할 때 비로소 사유하게 된다고 했다. 독자들은 누구나 이 장면에서 ‘용왕의 아들’이라는 이 교양 있고 늠름한 이들이란 대체 누구일까, 에 대해 곰곰이 자문하게 될 것이다.
다양한 대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안양대학교 한국학 전문가 마우리찌오 리오토 이탈리아인 교수는 그들은 배를 타고 온 중동인(아랍인, 또는 페르시아인)이며 그 중 한 사람은 의사였는데 그가 처용이다, 라고 말했다. 처용의 탈을 보면 분명 내국인이 아닌 중동인의 모습이다. 이후 처용은 역병을 고치는 인물(처용의 얼굴 그림을 붙이면 역신이 그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이라는 점에서 그의 견해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일연은 대상을 객관적 관점에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중동인 선원 7명이 선장과 함께 배를 타고 신라로 왔다’가 아니라 ‘용왕과 그의 일곱 아들이 바다에서 걸어 나왔다’는 특유의 낯설게 하기 기법으로 독자들의 상상력을 한껏 자극한다.
3) 하늘에서 자줏빛 줄이 내려오다
삼국유사 권2 편 ‘가락국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후한의 건무 18년 3월 계욕일(목욕하고 물가에 모여 음식을 먹는 날)에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 귀지에서 무엇을 부르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백성 2,3백 명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되 그 모양을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했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9간들이 대답했다.
“우리가 있다.”
“여기가 어딘가?”
소리가 다시 물었다.
“구지이다.”
또 말했다.
“하늘이 내게 명하기를 이곳에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 하였으므로 일부러 여기에 내려온 것이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 부르되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내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하고 춤추면 곧 임금을 맞이하여 기뻐 뛰놀게 될 것이다.
이 이야기는 대화체로 시작한다.
주인공인 수로라는 인물이 등장하기 직전 상황이다. 그러므로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하늘과 소통하는 자이면서 백성들과 소통하는 자이다. 숲을 사이에 두고 자신의 정체를 ‘숨기며’ 백성들과 단문으로 묻고 단문으로 대답하는 주거니 받거니 식 대화법을 쓰고 있다.
서로 소통이 이루어질 무렵 그는 자신이 장차 이 나라의 임금이 될 것임을 예고하며 ‘구지가’를 부를 것을 요구한다. 이윽고 백성들은 ‘거북아 거북아!’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
신과의 소통과 백성들과의 소통, 그리고 흥겹게 추는 춤과 노래.
이런 흥겨운 상황에서 주인공이 나타난다면 그가 하늘에서 내려오든 땅에서 솟아나든 백성들은 오케이다. 일연은 언제나 주인공을 이런 방식으로, 마치 기획하듯, 거부할 수 없도록 등장시킨다.
이 이야기는 수로왕의 탄생 신화다.
대체로 이런 류의 신화는 3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만들어진다. 믿을만한 작자의 입을 통해 등장하는 인물의 비범함을 이야기하면서 ‘그가 아무개다’ 라는 식으로 인물을 소개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이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은 3인칭 시점보다 더 심정적으로 친근감을 갖는 시점이다. 수로왕 이야기는 주몽이나 박혁거세의 당당하고 힘있는 탄생 신화와 달리 나무숲에 숨는 인간적 면모를 보이고 있다.
가락국 시조를 신라나 고구려 시조와 달리 조금 얕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어쩌면 이것도 일연이나 당시 사람들의 멸망한 나라를 대하는 태도에서 기인한 듯하다.
9간 등은 이 말을 좇아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추다가 얼마 안 되어 우러러 쳐다보니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 닿았다. 그 끝 붉은 보자기에 금합이 싸여 있으므로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6개의 황금알이 있었다. 다들 기뻐하여 백배한 후 싸안고 아도간의 집으로 가 평상 위에 두고 흩어졌다. 12시간이 지난 이튿날 아침 다시 찾아가 그 합을 여니 6개의 알이 6명의 어린 아이가 되어 있는데 용모가 매우 훤칠했다. … 이들은 나날이 자라 10여 일이 지나니 키가 9척으로 자랐다.̴… 그달 보름에 왕위에 오르니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 이름을 수로라고 했다.
이 부분의 중심 사건은 이렇다.
① 구지봉에서 노래를 부르다. ② 하늘에서 금합이 내려오다. ③ 6개의 알이 들어있다. ④ 이튿날에 보니 그 알이 모두 아기가 되어 있었다. ⑤ 10여 일만에 9척 신장으로 자라다. ⑥ 그 달 보름날에 수로가 왕이 되다.
이야기가 시간 순서로 가파르게 진행되는 서사의 표현 방식을 쓰고 있지만 사건 하나하나마다 떼어놓고 보면 이미지가 선명하여 절묘한 묘사의 효과를 내고 있다.
글을 마치며
삼국유사 속 이야기는 일연의 생존 당시, 해당 지역에서 회자되던 이야기거나 당시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소실된 책에서 인용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삼국유사에 옮겨 적을 때는 집필자 일연의 재가공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겠다.
삼국유사를 쓴 의도가 몽골 침략으로 강토가 피폐해지고, 백성들의 무너진 자긍심을 일으켜 세우는데 있었다고 본다면 일연은 흥미와 몰입 그리고 감동까지도 충분히 고려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일이 국사로서의 책무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어쨌거나 삼국유사는 실제로 있었던 사실을 다양한 방식으로 흥미있게 이야기를 빚어내고 있다. 그 이야기들은 분명 우리의 값진 문화유산이며,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 하여 새로운 장르로 창조해내는 역할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몫이 아닐까 싶다.
연오랑 세오녀, 만파식적, 귀신의 아들 비형랑, 이사부와 나무사자, 조신의 사랑, 이차돈의 순교 그리고 14수의 향가 등 수많은 이야기들이 작가인 우리의 손으로 새롭게 재창조되기를 기대한다.
참고문헌 및 자료
원본 삼국사기, 이강래 번역, 한길사 2013
삼국유사, 김원중 번역 민음사 2008
일연과 13세기, 고운기 보리 2021
안동 MBC 특집 다큐멘터리, 세계를 향한 큰 울림
강원아동문학회 여름세미나
발표장소 : 강릉 김동명 문학관
발표일시 : 2023년 9월 16일
발표자: 권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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