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1. 작가 인터뷰 (11)
아동문학가 권영상 선생님과 함께
-대담 엄소희
엄소희: 선생님, 안녕하세요? 바쁘실 텐데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잘 지내고 계시지요?
권영상: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엄소희 시인과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저도 반갑고 고맙습니다.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엄: 선생님, 동시 쓰신지 오래 되셨지요? 음, 1979년에 등단하셨으니 올해로 44년이나 되셨네요. 저도 동시를 쓰면서 늘 궁금한 게 있어요. 동심이에요. 동시가 동심을 바탕으로 쓰여지는 시라는 건 누구나 아실 텐데. 초보적인 질문 같지만 동심이란 뭔가요?
권: 저도 그걸 한 마디로 말씀드리기가 머뭇거려집니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소개해요. 아빠를 배웅하러 엄마랑 공항에 간 아기가 아빠가 비행기를 타는 걸 보고 돌아옵니다. 돌아오면서 하늘 높이 날아올라 점점 작아지는 비행기를 보며 아기가 이렇게 말하지요.
“엄마, 아빠도 지금쯤 작아졌겠다, 그치?
”엄: 아, 그거로군요. 우리가 학습을 통해 배우기 이전의 순수의식 같은 거요.
권: 이런 이야기로도 설명해 볼 수 있어요.
산속 성자를 만나려고 사람들이 줄지어 산을 오릅니다. 성자는 문을 열고 한 사람씩 방문객을 집안으로 맞아들입니다. 그리고 긴 회랑을 함께 걸어 출구의 문을 열며 안녕히, 하고 작별을 합니다. 그럴 때면 방문객은 소리칩니다.
“나는 성자를 만나러 왔소. 그를 만나게 해 주시오!”성자가 대답합니다.
“당신은 지금 성자를 보고 있습니다.”
“아니. 나는 당신이 아니라 성자를 만나러 왔소!”
엄: 성자를 마주 보고도 성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건 무엇 때문일까요?
권: 성자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죠. 성자는 고상한 얼굴을 하고, 흰 머리칼에 하얀 가운을 입은, 자신을 안내하는 그런 이가 아니라 성스런 방에 성스런 모습으로 있을 거라는 고정관념.
엄: 이제 조금 알겠네요. 성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만든 성자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란 거죠?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때 사물을 솔직히 볼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권: 명석하시군요.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상태’가 저는 동심이라고 봅니다. 동심이 깃든 시를 읽을 때 독자는 야! 하는 동시
읽기의 기쁨을 누리죠.
엄: 그런 동심이 배어있는 동시, 어떡하면 잘 쓸 수 있지요?권: 시를 잘 쓰는 데엔 당연히 수련과 테크닉이 필요하지요. 그러나 그보다 먼저 삶 하나하나에서 일어나는 동심을 포착하는 눈을 가져야 해요. 폴 빌라드의 <이해의 선물>의 한 장면을 볼까요. 주인공인 ‘나’는 사탕가게에서 먹을 만치의 사탕을 고르고 그 값으로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버찌씨 세 개’를 주인의 손바닥 위에 내려놓습니다.
동심이 발현되는 이런 현장을 가공해 내거나 볼 줄 아는 훈련이랄까.
엄: 좋은 동시를 쓰기 전에 먼저 순수해져야한다는 말씀 같네요.
권: 사람이 복잡한 현대를 살면서 아주 순수해지기는 어렵겠지만 조금은.
엄: 감사합니다. 동심에 대한 고민이 조금 풀린 것 같습니다. 근데 조금 전 선생님께서 순수해지기 어려운 게 현대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공감입니다, 선생님께서 등단하실 때와 지금, 많이 달라졌죠? 물론 동시도 그때와 많이 달라졌을 테고요.
권: 달라져도 너무나 달라졌죠. 그 무렵의 산업화가 지금의 정보화 사회로 바뀌었죠. 가장 큰 변화는 뭐니뭐니 해도 컴퓨터의 등장일 테죠. 저도 1980년대 중반부터 컴퓨터 워드프로세서로 글 작업을 했으니까 당연히 글의 전개방식도 달라졌죠.
제가 등단하던 시절의 동시는 어떤 면에서 보면 어린이보다는 동시 쓰는 어른 중심에 더 가까웠던 것 같아요.
엄: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었던 것 같아요.
권: 예전엔 동시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 생산해낸 동시들이 대개 국정교과서마냥 천편일률적이거나, 어린이 정서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금기시 하는 소재나 주제도 많았습니다.
그때의 동시가 훈육적이거나 고상한 주제 중심이었다면 요즘 동시는 그보다는 소박한 일상의 소중함을 다루거나 어린이 독자가 처한 힘든 상황에 솔직하게 다가가거나 대상을 치밀하게 다루어 공감을 이끌어내는 독자중심 동시로 발전했다고 봅니다.
엄: 동시를 오래 써오셨으니까 동시집도 많이 내셨지요?
권: 부끄럽습니다만 좀 그런 것 같네요. 2020년 상상출판사에서 나온 <고양이와 나무>까지 21권쯤 낸 것 같습니다.
보라: 동시뿐 아니라 동화도 많이 쓰셨고, 칼럼도 쓰시고 계시잖아요. 그 많은 글은 언제 어떻게 쓰시나요?
권: 동시 동화 그림책 산문집 등 한 70여권쯤 낸 거 같아요. 농사일을 부지런히 하시던 아버지를 보고 자라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리 넓은 논밭 일도 시작하면 반드시 끝을 내게 됩니다. 그런 경험이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주는 듯 합니다.
주로 오전엔 동네 우면산을 다녀와 시를 정리하고, 오후엔 산문에 치중합니다. 쓰는 만큼 지적 결핍에 허덕이지 않기 위해 책을 좀 읽는 편입니다. 요즘은 주로 유럽 초현실주의 미술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엄: 다양한 장르를 다루시기도 하지만 다양한 스타일의 동시를 쓰시는 분으로도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데 선생님 동시의 변모에 대해 좀 간략히 라도 듣고 싶습니다.
권: 제게 거 뭐냐. 주의력 결핍 같은 성향이 좀 있는 것 같아요.(웃음) 끊임없이 다른 소재를 찾고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힙합가수들처럼 말이에요. 사실 또 그 재미로 동시를 써 온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제 초기 동시들은 순수 자연, 그러니까 생명의 원천인 빛 이미지 탐구와 우리 고전인 삼국유사였어요. 1980년대 중반 서울로 직장을 옮기며 군부독재 통치를 겪었고, 자연스레 작고 힘없는 것들의 저항을 다루면서 동시집 <밥풀>과 <버리진 땅의 가시나무>를 출간했죠. 그 무렵 동화와 달리 동시가 소멸 위기를 겪었는데 그때 내놓은 것이 이야기 동시집 <신발코 안에는 새앙쥐가 산다>, <월화수목금토일별요일>이었습니다. IMF로 해체되어 가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동시집 <구방아 목욕가자>, <엄마와 털실뭉치> 등을 냈죠. 제 동시들은 대개 시대와 함께 생존해 왔던 거죠. ADHD 같은 성격도 한몫 했구요.(웃음)
엄: (웃음) 재미있으시군요. 시가 시대와 함께 호흡해야한다는 걸 동시집들로 증명해 주셨네요. 그렇다면 시가 안 읽히는 오늘날 우리는 어떤 시를 써야하나요.
권: 시가 안 읽힌다는 말은 맞는 말씀입니다. 비단 동시만이 아니고 대부분의 문학장르가 안 읽히고 있지요. 어떤 장르는 외면당하는 수준이고요. 동시도 한 사람의 머리로 완성이 어렵다면 드라마나 서사문학처럼 협업 쪽으로 이동할 필요도 있겠어요.(웃음)
동시가 안 읽히는 건 시보다 재미진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 아닐까요. 만화나 웹툰, 컴퓨터 게임 등도 그렇고, 독자들의 관심이 추리, 역사, 과학, 우주, 지리, 의학, 그래픽 등으로 관심 분야가 넓어졌기 때문이기도 하겠죠.
엄: 동시가 너무 재미 추구에 빠져도 문제겠지만 즐길 장르가 많은 시대엔 일단은 좀 재미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쵸?
권: 그렇죠. 어떤 상황에서든 문학은 의미나 주제 중심 글에 무게를 두어야 하지요. 하지만 정보가 넘치는 세상에선 아무래도 그 무게가 재미와 유희 중심 쪽으로 좀 옮겨 가야하지 않을까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국정정교과서 세대인 작가들의 한계가 드러나다 보니 자연히 글이 좀 재미없어지는데. 엄소희 시인, 우리 동시단의 블루오션 하나 알려드릴까요?
엄: 솔깃해지는 데요.
권: 상상 동시입니다. 국정교과서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운 상상, 과거엔 상상도 현실에 바탕을 둔 상상만을 요구했지만 지금은 상상 그 자체만으로도 값지고 고귀한 것입니다.
근데 다시 정색을 하고 또 말하자면 상상만이 답은 아닙니다. 시인이라면 시대의 아픔을 담아낼 새로운 언어를 찾아내거나 찾아가는 일에 더욱 고민해야 합니다. 그래야 동시가 오래도록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반려 장르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엄: 기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일반 시인들의 동시 장르 유입 어떻게 보시나요.
권: 저는 긍정적으로 봅니다. 동시가 우리들만의 리그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징조지요. 동시 쓰는 분들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있다는 것은 동시가 그만큼 다양해지고 다채로워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구요. 그와 함께 동시집을 출간하는 출판사들도 늘어나고 있으니까 이후의 동시 문학에 기대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엄: 그렇군요. 동시만 쓰시는 줄 알았는데 선생님께선 동화도 많이 쓰셨죠? 요즘 선생님 동화집이 안 나오는 것 같은데 무슨 이유라도 있나요?
권: 관심을 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둥글이 누나>(사계절 출판사) 이후 동화 쓰기가 중단되었습니다. 동화집은 단편 장편 모두 15권을 냈습니다. 맨 마지막에 나온 ‘둥글이누나’는 자전적인 동화였는데, 제가 동화를 쓰게 된 이유가 그 속에 다 밝혀진 것 같아 이제 저의 동화 쓰기 소임은 그쯤에서 끝냈습니다. 동화는 사실상 절필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엄: 사적인 자전 동화셨군요. 내용은 여쭙지 않겠습니다. 계간지 ‘동시발전소’에 연재하시고 있는 연작동시 ‘상상 동시가게’ 재미있던데요. 한 편 소개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림자를 바꾸세요'란 동시에요.
어떤 그림자를 갖고 싶으시나요.
멋을 아시는 분을 위해,
아니 검정 그림자 사용에 지친 분을 위해
색깔 그림자를 준비했습니다.
사이좋은 친구와
깨끗한 길을 나란히 걸을 때
그때, 산뜻한 연둣빛 그림자 어떠세요.
은빛 흰 그림자에 돋을무늬를 새겨넣은
품위있는 그림자도 마련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달릴 때
바람에 펄럭이는 당신의 멋진 초록 그림자,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원하신다면 지금 입고 있는 옷 빛깔과
동일한 맞춤그림자도 가능합니다.
갑자기 그림자를 사라지게 하여
사람들을 이크! 놀라게 하는
투명 그림자는 어떠세요.
당신의 검정 그림자,
이제는 바꾸실 때가 되었습니다.
엄: 감사합니다. 앞서 말씀하신 대로 유희적 냄새가 물씬 풍기네요. 이 동시에 대해 좋은 말씀 더 듣고 싶지만 지면 관계로 아쉽게 됐습니다. 이제 마지막 질문인데요. 시인들의 고령화와 동시 어떻게 보시나요?
권: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 고령 시인 중에 저도 들어가니까 마치 저에 대한 질문 같기도 하네요. 국민의 기대수명이 늘어나고 있으니 문단의 고령화도 당연하겠지요.
근데 다른 장르는 모르겠으나 우리 아동문학의 고령화는 조심스러운 면이 있긴 하지만 누군가 한번 짚어 보아야할 문제일 것 같아요. 아동문학은 작가인 어른이 어린이를 위해 쓰는 특수 문학이잖아요. 근데 작가가 고령화 되면서 이 두 생산자와 소비자의 갭이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에요, 이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 가물가물해지면 문학적 소통이 가능해질까요? 이것이 머지않아 우리가 닥치고 또 제가 닥치게 될 고령화의 고민입니다.
문제는 시에 대한 치열한 자기 검열입니다. 고령화가 될수록 더욱 자신의 동시에 대한 적극적인 검열이 필요한 때입니다.
엄: 어려운 말씀을 해주셨으니 이제 또 누군가가 이 문제에 대해 의미있는 말씀을 덧붙이게 되시겠죠. 그 점에서 곤란한 질문에 대한 답변 감사합니다.
여러 질문에 진지하게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좋은 시 오랫동안 만나 뵐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권: 감사합니다. 엄소희 시인께서도 좋은 작품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1979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1982년 <소년중앙문학상>에 동시 당선
1981년 첫 동시집 <단풍을 몰고오는 바람>이후 20여 권 출간
1986년 <한국동시문학상>, <이주홍문학상> 외 다수 받음.
1990년 <韓國文學>에 수필 당선.
그 해 <버려진 땅의 가시나무>로 우수 창작 지원금 받음
1993년<연예 정보신문>에 인도 기행 갠지스로 가는 길 연재
1993년동화 쥐라기 아저씨와 구두로 <MBC 동화 대상> 단편 부문 당선.
2000년단편동화집 <은고양이>로 대산재단 창작지원금 받음
2006년 동시 ‘햇빛이 칠해준 우리집, 공룡을 만들어 보자로 에듀 콘서트 <귀뚜리의 음악여행>공연(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 작곡가 신동일)
2008년 한국문화예술진흥위원회의 2008년도 우수창작지원금 받음
2010년 서울문화재단 문학기금 지원 받음
2015년 EBS 라디오 ‘윤덕원의 시 콘서트 ’시인을 만나다’ 출연
2016년 한국아동문학 현황과 발전 방향 국회 포럼. 토론자로 참여
2019년 동시집 <아, 너였구나!>, <실 끝을 따라가면 뭐가 나오지?> 중국 진출
2013년 서울배문중학교 퇴직 후 컬럼니스트로 활동함
2023년 <아동문학세상> 가을호(통권 122호)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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