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간의 여름 한때
권영상
매미 울음소리가 창문을 타고 밀려 들려온다.
오래된 아파트라 숲이 많다. 숲 안엔 매미들도 많다. 매미들은 숲에만 머물지 않는다. 가끔 창문 방충방까지 날아와 거실 안에다 대고 그 특유의 여름노래를 부른다. 그래도 시끄럽지 않다. 오히려 날아갈까 봐 가만가만 자리를 비킨다.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 1시 반쯤이면 산책삼아 아파트 후문 느티나무 숲길로 나간다.
숲이 온통 매미 울음소리로 출렁거린다. 어떻게 들으면 소낙비 소리 같고, 강물소리 같고, 해저음처럼 거대한 지축을 흔드는 소리 같다. 그러다가도 또 어찌 들으면 잔잔한 호수에 나와 선 듯 고요하다. 놀라운 거는 이 커다란 울음도 다른 생각에 잠시 빠지면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명 엄청난 목청으로 숲을 들먹이는 데도 나는 고요한 봄길을 걷는 것 같다. 소리로 가득하나 소리 하나 없는 듯 텅 빈 공간 같은 여름 숲이 그래서 좋다.
지금 숲이 떠나가라 울고 있는 이 매미들은 작년에 보았던 그 매미들이 아니다. 7년 전이거나 12년 전, 이쪽 빛의 세상을 다녀간 성충들의 자손이다. 그들은 그 오랜 시간을 땅속 컴컴한 어둠 속에 머물다가 이 세상에 나와 적게는 7일, 많게는 한 달을 살고 간다.
그들 생애의 목표는 짝짓기다. 그 일을 마치면 그들은 임무를 다한 귀대병처럼 돌아간다. 생애 주기에 비해 그들의 한때는 너무 짧다.
매미들도 짧다고 여기는지 그건 모르겠다.
7일 동안 그들은 짝을 찾는 일에 아름다운 생애를 다 바친다. 그들은 7일간의 이 빛의 세상을 사는 동안 그들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악기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만든다. 그 소리엔 사랑과 애원과 애틋함과 그리움과 설레임, 외로움, 환희 또는 열정이거나 유전자의 멋진 미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런 이유로 그들 울음소리는 언제 들어도 싫지 않고, 그 어떤 악기로도 흉내 낼 수 없다. 매미나 가을밤 풀벌레 울음소리는 인류가 수천 년을 들어온 귀에 익숙한 음악이다.
매미들에게 여름은 열락과 본능의 한때다.
그 한때를 뜨겁게 보내고 나면 매미라는 악기는 지상으로 추락한다. 동시에 지루하던 8월도 가고, 악기들의 연주도 끝난다. 폭염에 몸서리치던 여름도, 장마도 소나기 뒤의 무지개처럼 아쉽게 사라진다. 매미들은 다시 캄캄한 어둠이 되어 12년이라는 긴 침묵 후 또 어느 여름 날 우리 곁으로 돌아올 테다.
누구에게나 한때는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그 한때를 발산하는 공간이다.
매미들이 가고 나면 그 빈자리에 이번에는 가을 풀벌레들이 들어선다.
시골집에 내려가 늦은 밤, 불을 끄면 풀벌레 소리가 창을 타고 요란하게 넘어온다. 단연코 빼어난 녀석은 귀뚜라미다. 별에서 금방 내려온 별요정 울음처럼 또랑또랑하다. 간간히 사이사이로 파고드는 여치며 방울벌레 울음 또한 예쁘다. 이제 그들의 한때가 왔다.
창가에 서서 나는 나의 한때를 생각한다.
들뜬 열정과 서투른 치기로 쌓아올렸던 나의 한때는 갔다. 생각해 보면 젊은 날의 뜨거웠던 한때만 한때가 아니다. 그보다 더 멋진 한때는 치기어린 한때에서 벗어나 세상을 여유롭게 이해하고 조망하는 지금이 아닐까 싶다.
자유롭기만 하다면 먹고사는 일에서 벗어난 오후의 짧은 이 한나절도 나의 소중한 한때다. 그 한때를 위해 나에게 맞는 악기로 나의 노래를 부르고 싶다.
교차로신문 2023년 9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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