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오래된 역사를 방문하다

권영상 2023. 7. 31. 10:37

 

오래된 역사를 방문하다

권영상

 

 

 

폭우로 유실된 다리가 20여 일만에 드디어 복구가 됐다.

나는 그 동안 14 킬로나 되는 먼 거리를 승용차로 빙 돌아다녀야 했다. 14 킬리미터라면 먼 길이다. 그러나 그 길이 더욱 멀게 느껴진 건 다리가 코 앞에서 유실 됐기 때문이다. 집에서 불과 200여 미터 거리다.

나는 그 길을 서울에서 엿새에 한 번꼴로 오갔다. 길은 말끔한 포장길이지만 다리는 오래 되어 부실했던 모양이다. 다리를 해체하기 전에 논의 일부를 메우고 둥근 콘크리트 관으로 임시 다리를 놓았다. 불편하기는 해도 그 길 외에 다른 길은 없었다.

 

 

그러던 게 지난 달 14일쯤이었다.

안성 집 앞까지 왔을 때다. 형광막대를 든 분이 길을 막아섰다. 그 분 뒤에 노란 접근 금지 테이프가 길을 가로질러 쳐져 있었다. 그때 남쪽 지역에선 제방 둑이 무너지고, 우사가 잠기고, 사람이 개울물에 떠내려가던 때였다.

나는 그분 앞에 차를 멈추어 세웠다. 예상했던 대로 임시 다리가 유실됐다는 거다. 집을 코앞에 두고 난데없이 길이 막혔다.

돌아가는 길을 묻자, 그분은 한택식물원에서 우회전하라고 했다. 나는 그분 말보다 내비게이션을 믿고 차를 돌렸다. 영문을 모르는 내비게이션은 되돌아갈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더니 어느 지점부터는 집 방향으로 우회전 할 것을 한사코 권했다.

 

 

그의 성화에 못이겨 적당한 곳에서 핸들을 돌렸다.

산속으로 들어가는 좁은 1차선도로였다. 간신히 산언덕을 넘자, 이번엔 벼가 한창 자라는 논벌이 나왔다. 거기도 역시 1차선 시멘트 농로다. 조심조심 가는데 저쯤 앞에 막힌 물도랑을 파내고 있는 포크레인이 보였다.

포크레인 기사는 한길의 다리 유실 사고를 아는지 안 됐다는 표정으로 비켜갈 틈을 내줬다. 간신히 포크레인을 지나는데 이번엔 택시 한 대가 나처럼 길을 잃었는지 달려오고 있었다. 후진에 자신 없는 나는 도랑이나 논벌에 쳐박힐까 두려워 차에서 내렸다. 택시기사에게 사정 이야기를 했다. 다행히 그분이 자신의 차를 후진해 주었다.

 

 

천신만고 끝에 집에 도착한 뒤부터 좀 돌더라도 죽양대로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로부터 20여 일이 지난 오늘이다.

죽산쯤에 죽주산성이 있다는 걸 알았다. 안성 진입로 서 있던 이순신 장군 동상은 몽골군에 맞서 산성을 지켜낸 죽주 방초별감 송문수 장군이었다.

 

 

내친김이 물 한 병을 꿰어차고 죽주산성에 올랐다. 이 성은 한강 유역 진출을 꾀하던 신라가 처음 축조하였고, 이후 몽골 침입을 막기 위해 고려가 신라성의 바깥에 외성을 쌓았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조선이 신라성 안쪽에 내성을 쌓은 세 겹으로 둘러쳐진 성이다.

우리는 흔히 몽골 침입 시 고려가 속수무책으로 몽골군에 패했다고 알고 있지만 이곳은 고려군이 유일하게 승전한 산성, 죽주다.

초록에 지친 더운 여름, 780년 전의 역사 속 오솔길을 잠시 거닐었다. 그리고 이 땅을 지키던 그때 민중들의 절망과 환희의 목소리를 들으며 터벅터벅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길옆에 세워놓은 트럭에서 잘 익은 복숭아를 사고, 마트에 들러선 예전에 한번 구입한 적 있는 호박빵을 사들고 돌아왔다. 다리가 유실되는 바람에 뜻밖에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머물러 있는 오래된 역사를 방문하다.

 

교차로신문 2023년 8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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