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랑물에 띄우는 종이배
권영상
안성에 내려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아내가 쑥 타령이다.
쑥을 캐기엔 지금이 적당한 시기다. 지금이란 벚꽃이 지고 복숭아 과수원의 복사꽃이 분홍으로 필 때다. 아내의 머릿속엔 지난해 이즈음에 캐던 봄쑥이 단단히 입력되어 있거나 아니면 시절을 이해하는 힘이 생긴 듯하다.
멀쩡한 사내가 여자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쑥을 캐는 게 마음 내키지는 않지만 그걸 거절할 배짱도 내겐 없다. 아내를 따라 시장 가방에 음료수며 간식거리를 넣어 들고 지난해에 캐던 그 논벌 그 논둑으로 나갔다. 물을 받아놓아 논엔 물이 찰랑거렸고, 논둑엔 민들레며 냉이 쑥이 한창 크고 있었다.
"우리 논엔 약 안 치니까 얼마든지 캐세요. “
지난해다. 우연히 이 논둑에서 논둑 손질을 하는 주인어른을 만났다. 나는 그분과 나란히 논둑에 앉아 그분의 논을 사게 된 내력이며, 가정사를 들었는데 그때 그분이 그랬다. 어린 시절부터 소꿉놀이 하며 살던 고향이라 어느 논에 약 치는지 안 치는지 다 안다고 하셨다.
우리는 그때 그분의 말씀을 떠올리며 쑥을 캤다.
무논이라 논둑이 습기를 머금어 그런지 쑥순이 살이 올라 뽀얗고 통통하다.
이 넓은 논벌에 나와 있는 사람은 아내와 나뿐. 쑥을 캐다가 고개를 들면 잔잔한 무논에 건너편 마을이 고요히 들어와 있다.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집이 두 채, 담장 위엔 노란 개나리꽃이 피어 있고, 그 집 앞길을 사내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문득 우리가 건너 뛰어온 도랑물이 생각났다. 농로와 논벌 사이에 난 도랑에 촐랑촐랑 흘러가던 도랑물이 있었다. 위쪽 어디에서 관정의 물을 끌어올려 흘려보내는 모양이었다.
나는 쑥 캐던 손을 놓고 도랑으로 갔다.
풀잎 하나 도랑물에 던져본다. 풀잎이 개구쟁이 아이처럼 까닥대며 흘러간다.
집을 나올 때 우편물통에서 꺼내온 전기료 고지서를 꺼냈다. 전기료는 자동이체 되니까 이거야 그냥 두면 재활용지가 되고 말 것. 적당한 크기로 잘라 종이배를 접었다.
반듯하게 접은 종이배를 도랑물에 띄워본다. 물결을 헤치고 까닥까닥 잘도 흘러간다. 종이배를 따라 나도 도랑길을 걷는다. 저쯤 보내고 돌아와 다시 종이배를 접었다.
‘멀리 흘러가 푸른 바다를 만나렴.’
나는 어린 시절, 종이배에 실어보내던 그 말을 떠올렸다.
"우리들의 꿈을 이루게 해 다오."
언제 왔는지 아내도 종이배에 토끼풀 한 잎을 따 얹으며 소원을 말했다.
그리고는 멀리 멀리 떠나가기를 바라며 종이배를 도랑물에 띄웠다. 아내가 동동 떠가는 종이배를 보며 소녀처럼 손뼉을 친다. 나도 일어나 잘 가렴! 하고 가는 길을 배웅한다.
논둑으로 돌아가 마저 쑥을 캐는데도 4월 해는 길다. 건너편 산에선 산비둘기가 조을 듯이 울고, 무논에 얼비친 마을에선 수탉 울음소리가 길게 울려난다.
해가 기울 때까지 쑥을 캐고 그림자를 밟으며 집으로 돌아온다. “종이배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 아내가 묻는다. 나는 멀리 가고 있을 테지, 하고 대답한다.
논갈이를 위해 땅속에서 퍼 올려 흘려 받는 물인데 그 물이 가면 얼마나 멀리 갈까. 그걸 모를 리 없는 나도 아내도 멀리 가고있을 거라 생각하며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으면서도, 늦은 밤에 잠자리에 들면서도 우리는 말했다.
지금도 잘 가고 있겠지? 하고.
<교차로신문> 2022년 4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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