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버린 오래된 시간
권영상
베란다 창고를 정리하던 중에 낯선 종이박스를 발견했다.
낯설었지만 열어보고서야 알았다. 어머니 유품의 일부라며 집에서 받아온 상자였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15년도 더 되는 까마득한 시절에 돌아가셨다.
종이박스를 열었다. 베틀에 앉아 어머니가 삼베를 짤 때 쓰시던 바디와 북이 나왔고, 놋대접과 놋주발이 두 벌 들어있었다. 그리고 박스 바닥에 기억에 가물가물한, 아마 어머미가 쓰셨음직한 옻칠 밥주걱이 나왔다.
밥주걱이 왜 거기 담겨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걸 들고 한참이나 들여다봤다. 너무 많이 써서 한쪽 부분이 심하게 닳아버린 삐뚜름한 주걱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 닳아 없어진 부분이 자꾸 눈에 걸렸다. 나는 일그러진 달의 본디 모습을 그려내듯 사라진 부분을 그려봤다. 그 결핍된 부분 때문에 주걱은 바라볼수록 사람 마음을 허전하게 했다.
주걱은 일을 많이 하고 물러난 퇴물이 그렇듯 거칠고 거무스레하다. 그러나 표면만은 반듯반듯하다. 기계로 깎은 매끈한 표면이 아니라 평면 칼로 깎아낸 칼자국 때문인지 좋은 수제품 같은 느낌이 들었다. 크고 견고한 긴 자루에 넓적한 주걱부리.
나는 어머니의 유품을 다시 종이상자에 넣고 시간을 결박하듯 테이프를 붙였다.
이제는 다시 쓰기 어려운, 효용이 없다면 없는 어머니 유품들이다. 어머니가 이 주걱으로 밥을 하시고, 이 놋그릇으로 음식을 차리시고, 이 바디와 북으로 베 옷감을 짜시던 때도 이제는 멀리 멀리 아득히 흘러가 버렸다.
나는 유품상자를 있던 자리에 얹어두고는 창고문을 닫았다. 창고문을 다시 열게 될 때는 또 언제쯤일까. 1년이거나 아니면 2년. 아니면 어딘가로 이사를 갈 때쯤이거나. 그때까지 어머니의 시간은 이 창고 안에서 정지된 채 머무르겠다.
그날 오후, 누나와 전화 통화를 했다. 그러면서 내가 보았던 어머니가 쓰시던 물건들과 그 자루가 긴 닳아버린 밥주걱 이야기를 했다. 내 말을 한참 듣던 누나가 말했다.
“그 주걱 나도 알고, 나도 썼어. 그때 우리 집 밥식구가 12명이었잖아.”
누나가 그때 함께 밥을 먹던 식구들 이름을 일일이 기억 속에서 불러냈다. 그러고 보니 한 십여 년은 12명 식구가 같은 솥에서 지은 같은 밥을 먹고 살았다.
“그러니 그 주걱이 닳아버릴 만도 하지. 밥만이 아니잖아. 그걸로 조청도 고고, 장도 담그고, 간장도 달이고.”
누나는 말하는 도중, 그 오래된 옛 일을 떠올리는지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어머니가 15.6년 동안 병중에 있었으니 집안일은 누나 몫이었다. 어쩌면 이 닮아서 사라진 주걱의 결핍 부분은 그 시절 누나의 꿈이 사라진 부분일지도 모른다. 누나는 그때, 어머니 병수발 들랴, 그 많은 가족들 밥걱정하랴, 조카들이며 막내 동생인 나를 학교 보내랴, 아버지의 농사일 도우랴. 누나는 누나의 시간을 모두 가족을 위해 썼다.
“어머니 유품을 언제 누나 만나면 누나한테 드렸으면 좋겠어.”
내 말에 누나가 그걸 대체 무엇에 쓰려고? 하며 한사코 사양한다.
그래도 나보다는 그 유품들에 얽힌 기억이 누나가 더 많을 것 같았다. 하지만 또 한 켠, 그 오래된 기억이 누나에게 뭐 빛나고 영화로운 것이라고. 그런 생각도 들었다.
과거란 사라지는 것 같지만 아니다. 어딘가에 어떤 모습으로 또는 어떤 기억으로 갇혀 있다가 불현 쏟아져 나온다. 밥주걱의 닳아버린 부분처럼 허전한 모습으로.
<교차로신문> 2022년 4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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