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게뭉게 가을이 타오르다
권영상
창문을 열고 낙엽 지는 뜰을 내다보고 있을 때다.
길 건너 고추밭 주인 장씨 아저씨가 모아놓은 고춧대에 불을 붙인다. 푸른 연기가 뭉게뭉게 빈 아침 하늘로 날아오른다. 이 날을 위해 장씨 아저씨는 800평이 넘는 고추밭 고춧대를 산더미 같이 여기저기 쌓아놓고 말렸다. 고춧단을 들출 때마다 연기가 물씬, 하늘로 치솟아 오른다. 마치 연기로 만든 거대한 하늘기둥 같다.
아, 아니다. ‘잭과 콩나무’에 나오는 콩나무 기둥이다.
고추 농사가 올해 별로였던 장씨 아저씨 심경이 어쩌면 잭과 같을지 모른다. 저 연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거인의 성에 쌓아둔 금돈 한 자루를 둘러메고 내려오든가 아니면 황금알을 낳는 암탉이라도 한 마리 붙잡아 내려오고 싶겠다.
장씨 아저씨네 고추 농사가 시원찮은 까닭이 있다. 연작 피해 때문이다. 연작 피해란 같은 땅에 같은 작물을 연이어 짓는데서 오는 피해다. 이렇다 할 땅이 없는 장씨 아저씨는 내가 여기로 내려온 8년 내내 저 밭에 고추농사를 지었다. 잘 되는 해도 있었지만 올해는 병 때문에 너무 안 됐다. 거기다 10월 추위로 냉해까지 입었다. 두어 번 더 고추 딸 기회를 잃고 그만 고추대궁이 밑동을 베었다. 그랬으니 그 속이 숯검정이겠다.
어떻든 고춧대는 뽑아서 태워야 한다. 안 그러면 온갖 자기 질병에 시달려 수확이 형편없이 줄어든다. 그걸 피하려면 고추 심는 땅을 2.3년에 한 번씩 바꾸어 주어야 한다.
지지난 해엔 일찌감치 고추밭을 갈아엎고 호밀을 심었다. 세상물정 모르던 나는 돌아오는 여름쯤 바람에 일렁이는 호밀밭을 보겠구나, 싶어 기대했다. 근데 그게 연작피해를 막으려는 그루갈이었다. 호밀이 한창 크던 이듬해 봄, 고추를 심기 위해 장씨 아저씨는 그 좋던 호밀을 싹 갈아엎었다.
그때 내 마음은 아팠다.
그 밭 하나에 모든 걸 걸고 사는 장씨 아저씨 마음도 아팠을 거다.
그때 생각한 게 있었다. 한 자리에 오래 정주해 사는 인간에게도 혹시 연작 피해가 없을까. 뜻대로 안 될 때면 인생이 다 그런 거려니 하고 사는 체념, 그것 역시 일종의 연작피해를 닮은 정주피해일 것 같다.
같은 직장, 같은 일, 같은 취미를 오래 갖는 건 분명 세상을 대하는 눈을 그만큼 좁게 만든다. 같은 유의 독서도 그렇다. 같은 지역이나 같은 집에 오래 눌러 살거나, 비슷한 생활 습관이나 패턴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일도 정주 피해를 유발할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같은 일을 오래 반복하거나 한 자리에 오래 머물러 사는 데서 오는 정주 피해를 늘 겪으며 산다. 그게 지루함과 싫증과 권태와 우울감이다. 뭘 해도 통 재미가 없고 사는 맛이 안 난다. 여행을 떠나보면 그게 정주 피해감이라는 걸 안다.
고추밭 연기가 또 한 차례 뭉게뭉게 치솟는다.
연기가 고추밭을 벗어나 집 마당으로 밀려온다. 맵싸한 연기가 어쩐지 싫지 않다.
옷을 갈아입고 뜰 마당으로 나간다. 마당가에 쓸어모아둔 튤립나무 낙엽이며 복숭아나 뜰보리수 낙엽을 추스르고는 들고나간 신문지를 구겨 불을 붙인다. 낙엽에 옮겨 붙으면서 낙엽 타는 연기가 푸슥푸슥 오른다.
가을이 깊어간다. 꽃도 다 지고, 낙엽도 이제는 다 졌다. 어디 먼데서 겨울이 가을의 절기를 넘어서고 있는지 새벽이면 춥다.
<교차로신문>2021년 11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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