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깔 있는 아들이 타고 있어요
권영상
“성깔 있는 아들이 타고 있어요.”
운전을 하다보면 가끔 앞차 뒷유리에 붙은 이런 글귀를 만날 때가 있다.
한참 웃는다. 대체 아빠한테 성깔 부리는 아들이라니! 아빠가 운전을 좀만 격하게 해도 참지 못하고 빽, 소리 지르거나 와락 우는 그런 아들이라는 말이겠다. 그 아들이 앞차에 탔다. 내가 거칠게 운전해 그 아빠를 곤경에 빠트릴 이유가 뭐 있을까. 어린 아들이 성깔을 부리면 자연히 옆자리에 앉은 아들의 엄마 또한 성가시게 한 말씀하실 테다.
“애 좀 생각하고 몰어!”
그러면 힘든 건 운전대를 잡은 아빠다.
그러며 웃다가 정말 저 차 안에 성깔 있는 아들이 타고 있을까. 한번 웃자고 붙여놓은 거 아닐까 그런다. 고속도로는 고속도로대로 심심하니 한번 웃고, 혼잡한 도심 길은 도심 길대로 스트레스 받으니 한번 웃고. 그러자고 붙인 글귀 같다.
승용차가 막 대중화 되던 시기엔 주로 ‘초보’ 또는 ‘초보 운전’이 붙었다.
누구나 그걸 보면 함부로 경적을 울리거나 너무 가까이 접근해 초보 운전자를 힘들게 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때의 ‘초보’는 선배 운전자들이 돌보아줄 대상이었다.
‘양보해 주세요’ 그런 글귀도 있었다. 차 안의 운전자가 덜덜덜 떨며 운전대를 잡고 있거나, 아니면 여자 운전자일지도 모를 거라는 마음에 멋지게 길을 열어주곤 했다.
초창기에 등장한 이런 글귀들은 대체로 솔직한 고백처럼 보인다. 그리고 초보 딱지를 뗀 운전자들은 그를 배려하기 위해 내가 좀 불편해도 선배답게, 신사답게 양보했다.
길에 차량이 많아지고 거친 운전자들이 생기면서부터 ‘초보’나 ‘양보해 주세요’ 이런 말들 모두 그걸 빌미로 앞서 가려는 얕은 꼼수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 뒤 나타난 글귀는 보다 센 느낌의 ‘왕초보’나 ‘딥다 왕초보’, 또는 ‘아기가 타고 있어요’ 등이다. 왕초보나 딥다 초보는 초보인 걸 부끄럽게 고백하기 보다는 좀 장난스러운 데가 있다. ‘나 이런 사람이니 비켜줘’ 이런 느낌도 든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새로이 등장한 글귀가 ‘아기가 타고 있어요’다. 문학적으로 말하자면 간접 서사다. ‘초보’나 ‘양보’라는 말이 직설적이라면 이 문구는 아기를 통해 자신을 배려해주기를 바란다는 에둘러하는 표현이다.
이 문구에서 더 발전한 게 앞서 말한 ‘성깔 있는 아들이 타고 있어요’다. 분명 어조가 앞엣것 보다 강하다. 그 무렵 이보다 한술 더 뜬 ‘쌍둥이가 타고 있어요’가 나타났고, 이보다 더 임팩트한 ‘임산부가 타고 있어요.’가 등장했다. 이 문구는 쌍둥이를 넘어서 태아와 산모를 등장시킨다. 그들이 다치면 운전자인 아빠는 완절, 완전 절망이다.
근데 가만히 보면 이들 글귀는 ‘초보’를 알리는 멘트가 아니다. 자신의 운전을 방해하지 말아달라는 강요와 위협의 메시지가 담겨있다. 아내가 임신했다고 드러내놓고 알리는 일이나 아들이 성깔 있는 인물임을 알리는 것 또한 도덕성이 결여된 느낌이다.
근데 최근이다. 초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온 글귀가 있다.
‘양보해 주셔서 살짝 고맙네여.’ 라든가 ‘두근두근 첫주행길’ 등이다.
읽는 이의 감성을 자극하는 솔직함과 순수성이 엿보이는 글귀다.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강하게 양보를 요구하는 멘트가 아니다. 자신의 심정을 정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어떤 말이든 세상에 태어나면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고, 그리고 종내는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차량의 뒷유리에 붙은 글귀 또한 그렇다. 운전문화도 그러하기를 바란다.
<교차로신문> 2021년 11월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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