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김장철이 다가오고 있다

권영상 2021. 11. 4. 15:49

 

김장철이 다가오고 있다

권영상

 

 

“고장난 냉장고, 고장난 테레비 삽니다. 컴퓨터, 전화기, 가스렌지, 에어컨 삽니다. 고장난 시계, 고장 난 밥솥, 고장난 남편도 다 사드립니다. 차가 왔어요.”

그 말에 나는 아침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체 어떤 대범 무례한 장수길래 아침부터 그딴 소린지. 혹 그가 나를 집어갈까 싶어 빠끔히 창문을 연다. 바깥은 자옥한 안개 천국이다. 안개를 흔들며 성우 뺨치는 그럴싸한 목소리가 또다시 날아온다.

 

 

나는 대충 세수를 하고 아침을 준비한다.

꿀꿀한 날을 화창한 가을날로 확 바꾸어준다면 모를까. 나달나달한 나이를 산뜻하고 싱싱한 나이로 바꾸어 준다면 또 모를까 그냥 내다팔 것은 아직 없다.

식사를 마칠 즈음 바깥에서 또 마이크 소리가 울려온다.

“그릇 장수가 국민 여러분을 찾아 왔습니다.”

이번엔 중년 여성의 목소리다. “김장용 항아리에서부터 고무다라까지. 맞춤형 그릇장수가 여러분을 찾아왔습니다. 국숫그릇, 간장종지는 물론 김장용 버무리 매트까지 준비해 왔습니다. 지금 나오셔서 구경해 보세요.

 

 

그러고 보니 김장철이 다가오고 있다.

창문을 슬그머니 열어본다. 천천히 안개가 걷히고 있다. 안개 속을 지나가는 트럭에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온다.

‘김장용품 3종 세트에, 깐깐한 주부님들을 위한 저렴한 김장통까지 모시고 왔습니다. 망설이지 마시고 지금 나오셔서 구경해 보세요. 맞춤형 그릇장수가 왔습니다.’

가끔은 요 앞 3거리에 상 장수는 상도 펼쳐놓고, 그릇장수는 그릇도 내놓고 했는데 안개 때문인지 그냥 천천히 이동하며 저쪽 살구나무집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다.

 

 

달력을 보니 지난해엔 11월 18일에 무 김장을 했다.

김장이라 해 봐야 아내와 내가 할 수 있는 무김장이 전부다. 텃밭에 묻어놓은 무 구덩이를 본다. 추위에 얼까봐 급한 대로 뽑아 구덩이에 묻어두었다. 아무리 단순한 무 김장이라 해도 김장을 하려면 일단 아내의 시간에 맞추어야 한다.

 

 

해마다 배추김장은 여든이 넘으신 둘째 형수님께서 손수 만들어 택배로 보내주신다. 그 일만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이제 그 힘든 일 그만 하시라고 말씀드리지만 한사코 사양하신다. 어머니가 해주고 싶어하신 걸 제가 대신 해드리는 거니 걱정 말라신다.

막내인 내게 고구마 하나 보내고 싶어도 큰형 눈치가 보여 못 보내시던 어머니를 작은형수님은 곁에서 보아 오셨다고 했다. 그분들 다 세상을 뜨신 뒤 작은형수님께서 그때 어머니 마음을 못 잊어 내게 김장을 해 보내신다는 거다.

“보내지 말라, 그런 말은 마세요. 이제 이 일이 살아남을 이유가 됐네요.”

언젠가 전화 통화에서 작은형수님은 그런 말씀을 하셨다.

 

 

그 일이 살아갈 마지막 이유가 됐다는 말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런데 어떻게 김장 보내시는 일을 거두어 달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는가. 김장만이 아니다. 옥수수 철이면 옥수수, 감자 철이면 감자, 두릅 날 때면 두릅을 철철이 보내신다. 나이 먹은 시동생인 내 생일이 가까워 오면 생일밥 지으라며 찹쌀, 팥, 마른 미역까지 보내오신다. 그걸 받을 때마다 이미 늦었지만 ‘아, 이게 어머니 마음이었구나!’ 한다.

김장 채비를 하고 계실 고향의 작은형수님이 떠오른다. 전화부터 해드려야겠다.

 

 

<교차로신문> 2021년 11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