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가을이 남기고간 것들

권영상 2021. 11. 23. 16:07

 

가을이 남기고간 것들

권영상

 

 

아내가 동치미를 담그러 안성에 내려왔다.

간밤 소금에 굴려둔 무는 아내에게 맡기고, 나는 밭 정리를 하러 텃밭에 나왔다.

지난 번 강추위 예보에 서둘러 뽑은 무 밭 뒷모습이 꼭 우리의 뒷모습 같아 그간 부끄러웠다. 이랑마다 무 뽑은 그 판한 구멍들이며 여기저기 급한 대로 잘라놓은 무순들, 무 구덩이에 무를 묻느라 파헤친 흙들, 그리고 어지럽게 찍힌 발자국들......

 

 

이 자리에 무씨를 넣은 건 지난 8월 15일이다. 40년 그 이전부터 고향의 아버지는 어김없이 이 날 무밭에 무씨를 넣으셨다. 그것을 내가 물려받았다. ‘이랑은 굵게 무 상간은 넓게.’ 글 모르는 아버지의 무 키우시는 신념이다.

그러나 그건 아버지가 경작하시는 기름진 밭에는 맞는 말이지만 거름기 적은 이 안성 텃밭엔 맞지 않다. 그렇긴 해도 나는 그 신념을 존중한다. 그건 무 욕심을 더는 내게도 좋지만 자리를 서로 멀리 앉는 무에게도 좋은 거다. 무 간 사이가 좁으면 무끼리 서로 경쟁을 한다. 그러면 잎줄기만 무성해지고 정작 무 밑은 굵지 않는다.

 

 

땅이 썩 좋지 않지만 무들은 저들이 머문 환경을 이겨내느라 애썼다. 가뭄에도 잘 견뎠고, 무엇보다 나비 애벌레들의 왕성한 식욕에도 굴하지 않고 잘 살아냈다. 농약을 멀리하고 무 배추를 길러내는 일은 말이 쉽지 어렵다. 논벌에 날아오는 참새 떼는 쫓을 수 있지만 무밭에 날아오는 나비들은 누가 일일이 쫓을 수 있을까.

한창 나비 번식기인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오는 시기는 무들에게는 고난의 시절이다. 한 눈 팔면 잎은 간 데 없고 잎 줄기만 앙상하게 남는다. 돋보기를 끼고 애벌레들을 찾아내지만 나비들은 사람 눈을 피해 무순 사이로 낮게 숨어들어 알을 낳아놓고 달아난다. 나비들에게는 이 시기가 절체절명의 시기다. 이때를 놓치면 알을 낳는다 해도 허사다. 애벌레로 성장한다 해도 이미 기온이 떨어지면 성충이 될 수 없다. 그러니 결사적으로 숨어든다.

 

 

나비들만 그런가. 무들도 마찬가지다. 일조량이 가장 풍부한 그 시기에 무순을 키우지 못하면 무 밑을 살찌우지 못한다. 그렇기에 나비 애벌레들에게 온몸을 바쳐가면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글버딛고 일어난다. 자연이란 같은 종끼리도 경쟁하지만 다른 종끼리고 먹고 먹히면사 살아낸다.

나는 갈퀴를 들고 무밭에 널브러져 있는 무순들을 한데 모은다. 괭이로는 거칠게 파헤친 흙을 고르고, 이랑에 판하게 뚫린 무 구멍들을 이리저리 메운다. 그렇게만 해 놓아도 텃밭 모습이 한결 순하고 온전해진다. 아쉬운 건 한 때 결실을 맺기 위해 부지런을 떨던, 지상에 남긴 그들의 흔적이 쉬이 잊혀지고 만다는 거다.

 

 

그런 까닭에 어느 해엔 고춧대며 가지대 모두 저들이 섰던 자리에 그대로 둔 적도 있다. 뜰안 주변에 빙 둘러심은 프렌치 메리골드나 칸나, 함박꽃, 저절로 난 쑥부쟁이도 뽑지 않고 마른 꽃대를 그대로 두어본 적이 있다. 그들의 겨울을 견디는 모습이 애잔하다. 그러나 그 모습을 통해 그들과 함께 했던 시절을 떠올릴 수 있어 좋을 때도 있다.

 

 

텃밭 정리를 하고 방에 들어오니 아내도 동치미를 다 했는지 준비해온 댓잎을 넣고 항아리 뚜껑을 덮는다.

“이제 한겨울이면 동치미 먹을 수 있겠다!”

아내가 흐뭇해한다. 텃밭 무가 우리에게 남긴 늦가을 선물이다.

동치미 항아리를 들어 빈방 불기운이 없는 자리를 잡아 앉혀놓는다. 천천히 익어 눈 내릴 무렵 한 때 치열하게 살았던 삶의 열기를 맛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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