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부분일식을 건너는 오묘함

권영상 2020. 6. 22. 19:17

 

부분일식을 건너는 오묘함

권영상

 

 

기온이 쑥 오른다. 살갗에 닿는 온도가 한여름 수준이다. 거실에 드러눕는다. 열어놓은 문으로 바깥 열기가 고양이처럼 달겨든다. 일요일이라고 마냥 빈둥거릴 수 없다. 내 방에 들어가 다시 의자에 앉는다. 창밖에서 색소폰 소리가 들려온다. 보나마나 길 건넛집 남자다. 그도 이 폭염을 견디지 못해 색소폰을 든 모양이다.

 

 

배호다. 그의 몇 안 되는 연주 중 제법 부는 곡이 배호의 ‘마지막 잎새’다. 인터넷 반주가 흘러나오고 거기에 맞추어 그가 분다. ‘그 시절 푸르던 잎 어느덧 낙엽지고, 달빛만 싸늘히 허전한 발길.’ 짐작하건대 그는 지금 방안 반주 기계 앞에 있다. 앰플리어는 방안에 있고, 왜인지 스피커는 바깥에 설치해 놓았다.

그의 연주에도 폭염이 느껴진다. 전에 없이 자꾸 틀린다. 틀리면 틀리는 대로 반주를 따라가느라 거칠게 밀어붙인다. 그래도 그의 연주를 감상해주는 이가 있다. 그의 아내다. 연주가 끝나면 브라보! 를 외치며 박수를 쳐준다. 그들이 이 동네에 이사 온 지 반 년쯤 됐다. 집이 산과 산 사이 고랑에 있어 일상의 말소리까지 산의 반향에 턱없이 크게 들린다.

 

 

“여보, 멋져요!”

그쯤이면 연달아 나오는 곡이 있다. ‘한 잔 술에 설움’이라는 노래다. 이윽고 전주가 흘러나온다. 지난 초겨울이다. 대추나무집 할머니가 딸네 집으로 가버린 길 건너 그 집에 중년의 부부가 들어왔다. 그들은 대추나무를 베고 쇠그물 울타리를 치고 밤이면 마당에 촉수 높은 등을 켜고 쿵짝쿵짝 가요를 틀었다. 조용하던 동네가 제법 흥겨웠다.

당신이 부르면 달려갈 거야를 즐겨 틀더니 언제부턴가 색소폰을 불기 시작했다. 남자가 반주에 맞추어 ‘한 잔 술에 설움을’을 불기 시작할 때다.

 

 

서울 집에서 전화가 왔다.

지금 부분 일식 중이란다. 이제야 그 뉴스가 생각났다. 은박 과자 봉지를 펼쳐 들고 해를 보면 잘 보인다고 보란다. 초코파이 빈 봉지를 들고 나가 일식 중인 해를 쳐다봤다. 검은 달그림자가 또렷하다. 길 건넛집 남자가 색소폰을 부는 사이 달은 야금야금 해를 집어먹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이 야릇한 천기를 무사히 넘기기 위해 자꾸 틀리는 색소폰을 부는지 모른다.

눈에서 초코파이 봉지를 떼고 사방을 둘러본다. 해가 45퍼센트의 빛을 잃은 때문일까. 세상이 소나기 끝처럼 멀겋게 보인다. 빛나는 것도, 또렷한 것도, 야무진 것도 아닌 생기를 잃고 우두커니 서 있다. 공룡이 멸종해가던 때의 분위기가 이렇지 않았을까. 밤도 낮도 아닌 흐릿한. 세상이 질병에 감염된 것처럼 묘했다.

 

 

스무 살 무렵, 내가 처음 겪었던 그때의 일식도 그랬다.

그때는 고향의 호숫가에 나와 있었는데 일식이 깊어지자 호수 풍경이 불투명해졌다. 품질 낮은 선글라스를 낀 것처럼, 충격을 받아 흐리멍덩해진 얼굴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멍한 호수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호수 건너편에서 누군가 트럼펫을 불었다. 해가 점점 가물가물 힘을 잃어가던 그 시각의 트럼펫 소리는 낯설었다. 마치 외계의 별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호수며, 갈대며, 거기 노는 물새들 모두 회색빛으로 낯설었다.

 

 

길 건넛집 남자는 ‘한잔 술에 설움’의 2절을 향해 가고 있다. 여전히 해는 한 입 사과를 깨물어낸 형상을 하고 있고, 인터넷은 가락지 같은 대만의 금환일식을 보여준다. 대만은 태양의 기운을 거의 다 잃은 으스스한 한낮을 맞고 있겠다. 길 건넛집 남자가 부는 색소폰 역시 어쩌면 이 오묘한 천기를 건너기 위한 야릇한 몸짓 같다.

 

교차로 신문 2020년 6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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