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옥순 시인의 동시집 '하느님의 빨랫줄' 해설>
아버지가 보여주는 아름다운 세상
권영상
구옥순 시인이 보내준 시들과 여러 달 동안을 함께 살았습니다. 노란 가을볕 아래 마주 앉아 오랫동안 눈을 맞추고, 오랫동안 속엣 말로 이야기를 나누고, 고개를 끄덕이고, 웃고, 또 슬퍼하기도 했지요. 그렇게 우리는 오래된 인연처럼, 실로 말로 다할 수 없는 아름다운 대화로 서로를 깊이 물들여나갔지요. 그러한 까닭에 <하느님의 빨랫줄>에 담겨 있는 57편의 시들치고 더 소중하고 덜 소중한 것 없이 모두 사랑스러웠던 거지요.
나는 2019년 5월 어느 날, <이 계절에 심은 동시나무> 구옥순 시인의 ‘도롱이 속 주머니나방애벌레의 꿈’(열린아동문학 통권 81. 2019 가을호)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러느라 그분의 출생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삶과 문학 역정을 찬찬히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번 동시집 <하느님의 빨랫줄>은 그 연장선상에서 다시 만나는 시집이라 지극한 친밀의 정이 나를 휩싸고 돕니다.
그렇지만 시인에게 있어 그 긴 시간은 단순한 공백기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먼 훗날 보다 깊고 우묵한 시를 키워 올리는 침묵의 시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정말이지 시인은 신화처럼 30년이라는 긴 시간을 딛고 일어나 2009년 동시 ‘오른손과 왼손’으로 부산여성문학작가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복귀하였던 거지요.
그후 4년 뒤, 시의 물꼬가 열린 시인은 제 2동시집 <꼬랑꼬랑 꼬랑내>를 출간했습니다. 그의 시엔 힘들었던 지나간 과거의 그림자들이 은은히 얼비쳐 있었습니다. 시란 당연히 과거 속에서 태어나지만 동시라는 장르는 워낙 특수해서 과거의 경험으로 빚어진 시는 자칫 현재의 어린이 독자와 멀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품고 있는 거지요. 그런 중에도 초기시에서 보여주었던 순수한 구 시인만의 동심의 세계를 유감없이 보여주기도 했지요.
구옥순 시인이 일관되게 독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분명하지요. 누구에게나 아픔과 상처는 있다. 하지만 상처를 딛고 일어나는 데엔 서로를 잡아주는 손이 필요하며 그 손을 통해 존재는 더욱 완전해진다는 것입니다. 구 시인 시의 오솔길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 암호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타자를 어우러 안거나 품어 안는 포용만이 세상을 완전하게 만든다는 것이지요.
한 알에서 시작되는 우주
봄 흙 같이 고물꼬물한
내 가슴 속에
새까만 꽃씨 한 알
살포시
심는 일
-‘희망이란’
서랍장 구석에
땡땡이 양말 한 짝
빨강, 노랑, 하얀 양말
모두들 팔짱끼고
룰루라라
바람 쐬고 오는데
도대체
내 짝은 어디로 갔지?
-‘양말 한 짝’
우리는 작지만 예쁜, 희망이라는 씨앗을 가슴에 품고 살지요. 희망이 몸 안에서 꼼틀대는 한 우리는 출발을 꿈꾸지요. 고 작은 겨자씨만한 희망이 있어 우리는 그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그곳을 향해 방향을 틀고 즐겁게 발길을 옮겨나갑니다.
구옥순 시인 시의 출발은‘새까만 꽃씨 한 알’을 마음속에 살포시 심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한 알의 씨앗이 ‘고물꼬물’ 자라 ‘하느님의 빨랫줄’이라는 시의 숲을 만들고, 빤히 보일 듯 한 숲 너머의 길을 향해 설레는 첫발걸음을 뗍니다.
지금은 서랍장 구석에 짝 없이 박혀 있는 양말 한 짝도 머지않아 짝을 찾게 되면 서로 팔짱을 끼고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떠날 테지요. 구옥순 시인에게 있어 출발은 늘 그렇습니다. 그의 생애가 그랬듯이 불완전한 한 짝은 또 다른 불완전한 짝을 찾는 동안 수많은 시련을 겪고, 그래서 완전해지지요. 그 점에서 짝 없는 양말 한 짝은 그리 외로워 보이지 않네요.
아프지만 시련이 필요해
뻣뻣한 배추
푸릇푸릇 싱싱하게 자랐지만
뻣뻣한 그대로는
김치가 될 수 없지.
소금 켜켜이 뿌려
진한 눈물 흘리고 나면
살강살강 아삭아삭
부서지지 않고
포기포기 돌돌 감아
맛있는 김치된대.
-‘배추에 소금뿌리는 이유’
오이 옆에 옥수수를 심었다.
둘은 무럭무럭 잘 자랐다.
오이가 덩굴손을 내밀자
키 큰 옥수수가 얼른 손을 잡아주었다.
봐!
경쾌한 음악이 나오니
화려한 무도회가 열리지
-‘손잡고 춤을’
구옥순 시인의 시를 이해하는데 있어 위의 시 ‘배추에 소금 뿌리는 이유’는 꼭 딛고 건너야할 징검돌입니다. 배추가 김치가 되려면 반드시 겪어야할 과정이 있습니다. ‘불완전한 존재→ 자기 인정 → 타자와 어울림 → 완성’이라는 단계입니다. 배추는 싱싱하고 뻣뻣한 자신의 성질을 버리고 소금과 어우러져 진한 아픔의 눈물을 흘린 뒤에야 비로소 자신과 전혀 다른 맛있는 김치가 된다는 논리가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삶이란 혼자서는 완전해지거나 또 다른 자신으로 태어날 수 없다는 말이지요. 이런 유형의 시들은 시집 여러 곳에서 산견 됩니다. 그것은 시인 자신의 삶의 행로가 그러했던 까닭에서 기인한 게 아닌가 합니다.
오이와 옥수수의 아름다운 삶을 한번 들여다보아요. 둘은 서로 이웃하여 경쟁하며 살지만 서로 배척하지는 않습니다. 오이가 잡아달라고 덩굴손을 내밀면 옥수수는 그 일이 불편한 일인 줄 알면서도 그 손을 잡아주어 함께 성장하지요. 구 시인에게 있어 둘은 그 점에 있어 매우 의미 있습니다. 경쟁하면서도 서로 협력하는 모순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시입니다.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할 길을 제시하고 있는 듯 해 자꾸 읽고 또 읽어보게 됩니다.
순수한 동심의 시들
앗!
모르고 섞어버렸네.
고만고만한 새까만
쥐눈이콩과 나팔꽃씨
플라스틱 통을
비스듬히 세워두고
한주먹 뿌리며
또로록 굴러라.
쥐눈이콩!
그 자리에 멈춰라.
나팔꽃씨!
-‘쥐눈이콩과 나팔꽃씨 가리는 법’
쥐가
박쥐에게 그랬대요
-날개가 있어 좋겠다
황금박쥐
그러자
박쥐가 뭐랬게요?
-좋으면
너도 날마다 거꾸로 매다려 있어 봐.
-‘쥐와 박쥐’
두 편 모두 시인의 어떤 의도가 크게 작용하지 않는 순수한 동시들입니다. 어린이답거나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대하고 있네요. 색깔과 크기가 같은 쥐눈이콩과 나팔꽃씨가 어쩌다 뒤섞였어요. 그걸 가려내는 방법에 대해 시속 화자는 빨래판 같은 플라스틱 통을 비스듬히 세워 이들을 뿌려보라는 거지요. 그 방식이야 어떻든‘또로록 굴러라./쥐눈이콩!’,‘그 자리에 멈춰라./ 나팔꽃씨!’를 소리치며 노는 아이들의 떠들썩한 모습이 눈에 선한 놀이동시입니다.
순진한 쥐가, 아니 우리 나이로 치면 세 살만한 쥐가 날개를 가진 박쥐를 부러워합니다. 그것도 황금박쥐! 너는 날개가 있어 좋겠다고 묻자 박쥐가 뭐랬게요? 합니다. 그러자 그럼, 너도 날마다 거꾸로 매달려 봐. 하네요.
우리는 늘 타인을, 또는 타인의 것을 부러워하지요. 그러나 내가 부러워하는 그에게도 내가 모르는 아픔이 있다는 거지요. 이것이 동심 속에 슬쩍 감추어둔 시인의 조용한 눈짓 같습니다.
아버지가 보여주는 세상, 수평선
오르기 힘든 곳
잘못 밟으면
미끄러지기 쉬운 곳에
아버지는
밭에 뒹굴던 납작한
돌들을 모아
계단을 만든다
큰 돌 밑에
작은 돌을 받치고
돌들을 여러 번
들었다 놓았다
어깨를 맞추어 본다.
기울지 않고
반반하고 편편하게
올라가기 쉽고
내려가기 편하게
오늘도 계단을 오르내리며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돌계단’
구옥순 시인의 시에 처음 출현하는 시어가 있습니다. 아버지입니다. 그의 동시집 4권을 통틀어 처음 나타나는 아버지가 아닐까 합니다. 시인은 징병에 나갔다 돌아온 아버지를 어린 중학교 무렵에 잃었고, 그런 연유일까요. 그의 시에 아버지는 부재했지요. <하느님의 빨랫줄>에서, 사라진 아버지가 출현했다는 건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아버지의 돌계단을 만드는 법은 자세합니다. 계단 하나를 만들기 위해 아버지는 큰 돌 밑에 작은 돌을 괴거나 큰 돌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판판하게 수평을 만듭니다. 이런 수평으로 만들어진 계단이 하나하나가 놓이면 수평은 다시 상승하여 층계를 만듭니다. 아버지는 오르기 쉬우라고 이런 계단을 만들지만 모든 일엔 평등과 그리고 신분이 다른 계층이 함께 어울려 존재한다는 이치를 은연중에 보여줍니다. 화자가 계단을 오르며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도 어쩌면 이것을 천천히 이해하고자 하는 일일지 모릅니다.
아침에는 해님을 널었다가
저녁에는 달님을 널었다가
엄마, 아빠, 내 옷 함께 널어
말리는 빨랫줄처럼
노예로 팔려간 톰 아저씨 마음도 널고
시리아 난민아이 쿠르디 젖은 신발로 널고
이산가족들의 말없는 한숨도 널어
이 세상 구석구석 힘없는 사람들 눈물
뚝뚝 떨어뜨려 말려주는 빨랫줄
수평선
-‘하느님의 빨랫줄’전문
이 동시집의 표제 동시입니다.
구옥순 시인의 이미 출간된 세 권의 동시집들은 대체로 가족 구성원이 이루어내는 따뜻한 가족애에 그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그건 우리 동시가 대체로 그런 모양을 가지고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구옥순 시인의 동시나무’를 쓰며 나는 넌지시 이제 구 시인의 시선이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더 넓은 세계로 확산되기를 바랐지요. 어쩌면 그 말에 대한 화답일까요. 통 큰 동시 한 편을 발견하고 내심 기뻤습니다.
이 시의 핵심은 수평을 지향하는 빨랫줄입니다. 그것은 앞의 시 ‘돌계단’에서 평평하게‘어깨를 맞추어 주는’ 아버지의 수평의 의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시인의 눈은 톰 아저씨로, 쿠르디 난민 아이에게로, 이산가족으로 확산되면서 그들의 아픔이 빨랫줄처럼 신분과 계층의 구애 없이 평등하게 위로받아지기를 바랍니다. 그 일은 시인이 간절히 사모하시는 시인의 ‘하느님’처럼 공평하게. 부디 그렇게 되기를 염원합니다.
그 동안 구옥순 시인의 시의 숲에서 길을 잃지 않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의 시가 끝내 추구하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불완전하다. 불완전한 것은 또 다른 불완전한 것들과 경쟁하며 서로 손잡을 때 완전해진다. 그 배경엔 똑 같이 위로하고 달래주는 빨랫줄의 평등성이 깔려있습니다. 계층이 있고 경쟁이 있으되 서로 배려하고 손잡아주는 평등한 수평선 그 너머의 세계를 꿈꾸어 보며 시인의 꼭꼭 눌러쓴 시에 경의를 표합니다.
<하느님의 빨랫줄> 발간을 축하하며, 이 시들이 독자들 가슴에 오래오래 머물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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