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비평

가공 되지 않은 시의 자연성

권영상 2019. 10. 14. 12:02



가공 되지 않은 시의 자연성

권영상



창작 과정을 펼쳐놓고 보자면 시란 가공의 산물이다. 첨가어인 우리 언어의 특징 때문에 수없이 많은 퇴고가 필요한지는 모르겠다. 어떻든 시는 처음 떠오르는 대로 쓴 텍스트를 오랫동안 깎고 구부리고 비틀고 깁는 일과 적절한 시어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반복된 노동에 의해 생산된다. 그런 수고로움으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한 편의 시를 얻는 경우도 있지만 텍스트가 가지고 있던 본디의 시맛이 사라지고 전혀 다른 엉뚱한 모습의 시와 맞닥뜨릴 때도 있다.

그 모두 시인이 시에 가하는 작의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들이다. 작의는 시를 시답게 가공하는 테크닉의 원류이지만 오히려 시의 자연성을 해치기도 한다.


흰 달빛/ 자하문// 달안개/ 물소리// 대웅전/ 큰 보살// 바람소리/ 솔 소리// 범영루/ 뜬 그림자/ 흐는히/ 젖는데// 흰 달빛/ 자


하문/ 바람소리/ 물소리


누구나 다 아는 박목월의 ‘불국사’이다.

어미나 조사, 또는 수식어 등을 깎아낸 시인 듯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깎고 다듬어내어 뼈대만 남긴 시가 아니라 본디부터 수식어나 첨가적인 말로 사물의 본성을 어지럽히지 않으려는, 가공하지 않은 사물 그대로를 툭툭 던져놓은 무기교의 담백한 시다.


솔밭 모래에 앉아서/ 커피 한 잔을/ 둘이서 마셨지 / 모자라지/ 한 잔 더 할까…….


황금찬의 ‘커피 한 잔의 구름’이라는 시의 앞부분이다.

이 시 역시 모양새가 다르지만 무기교의 의도가 엿보인다.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고 있는 일을 굳이 깎고 다듬고 할 것도 없이 그대로 시 속에 이끌어 들였다. 그러면서도 부족한 듯한 인생의 목마름을 간절하게 표현한다.



두 시 모두 시를 가공하지 않았다거나 가공했으나 전혀 가공하지 않은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 서로 닮았다. 시의 행과 연을 빌어 사물을 툭툭 던져 놓아두거나 일상의 언어를 조탁하지 않고 그대로 시의 집에 이끌어 들인다. 시인 듯 시 아닌 듯한 경계를 걸어가는 시는 아름답다. 시의 허구성이 조용히 묻혀가기 때문이다.

이번호엔 작위성을 느끼기 어려운, 자연성 그대로의, 그러니까 가공의 흔적이 덜 느껴지는 시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그런 시가 동시로서 얼마나 적절한가 아닌가, 성공했느냐 아니냐는 나의 몫이 아니다. 이런 시의 가능성을 더듬어 보려는데 있다.


1. 독자적 언어를 배제한 시


말이 너무 많으면/ 말 같지 않고/ 말이 너무 적어도/ 말이 안 된다.

              

                                                         -강정규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전문 <어린이와 문학> 2019년 가을호


사람들이/ 내 얼굴은 달덩이 같다고 해서/ 보름달 하나 그렸다// 내 눈썹은 송충이 같다고 해서/ 송충이 두 마리 그렸다// 내 눈은 머루 알 같다고 해서/ 머루 두 개 그렸다// 내 코는 돼지 코 같다고 해서/ 동그라미 하나에 점 두개 찍었다// 내 입술은 앵두 같다고 해서/ 입 꼭 다문 앵두 하나 그렸다// 다 그려놓고 보니/ 이건 사람이 아니다

                    

                                                                         -안상학의 ‘내 얼굴 그리기’ 전문 <동시마중> 2019년 8.9월호



두 편 모두 독자적 언어가 배제되어 있다.

강정규의 ‘더도 말고 덜도 말고’는 일상에서 흔히 쓰이는 말을 글자 하나 빼거나 넣지 않고 그대로 데리고 들어와 시입네, 하고 배열해 놓았다. 제목 또한 한가위만 돌아오면 누구나 가리지 않고 흔히 쓰는 말이다. 시인만의 언사는 일언반구도 없다. 시인이 닳고 닳은 시쳇말을 굳이 시 속으로 모셔와 버젓이 행과 연 위에 앉혀 놓은 이유는 두 말할 것 없다. 말 같지 않은 말이 난무하는 우리 세상에 대한 경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안상학의 시도 그렇다. 시인의 독자적 언어가 없다. 세상 사람들이 내 얼굴이 무엇무엇 같다고 하니까 그들의 말대로 그렇게 그릴뿐 나의 독자적이며 주체적인 언어와 의도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타인이 본 나도 그렇지만 비유야말로 얼마나 본질을 빗나가게 하는 왜곡된 언어인가. 다 그려놓고 보니 이건 사람이 아니었다.



2. 시어가 된 일상어의 자연스러움


하부지 왜 엄마 꿈에만 가요?/ 나랑 더 친했으면서/ 바쁘다고 하부지 혼자 막걸리 마시게 한 엄만데./ 툴툴거렸더니 엄마가 더 속상한 말을 했어요./ 하부지랑 나랑 한 치 건너 두 치래요./ 그게 뭐냐 했더니,/ 손가락 한 마디 조금 넘는 사이인 엄마랑 하부지 사이는 한 치고,/ 엄마의 딸인 난 한 치도 아니고 두 치잖아요./ 할아버지 우리 그런 사이 아니잖아요./ 한 치도 두 치도 흥 치치에요./ 싫어요. 다 무효에요./ 한 치는 차가워요./ 그냥 우리 둘 사이 반 치로 할래요./ 한 치보다 더 가까운 반 치로요.// 하부지 하부지도 그러자 할 거죠!

                      

                                                                      -조하연의 ‘흥, 치치’ 전문 <동시먹는 달팽이> 2019년 가을호


아침마다/ 잠에 빠져 정신 못 차리는 우리 가족을/ 깨우는 건/ 우리 집 밥통이다// 아침마다 우렁차게/ 파파 푸-/ 달큼한 밥내 풍기면서/ 파파 푸- 파파 푸-/ 소리치면// 이불 박차고 일어나 간다/ 밥통 앞으로 섯!

                  

                                                                -김양경의 ‘밥통 앞으로 갓’ 전문 <어린이와 문학> 2019년 가을호


시는 시어의 절약을 요구하면서 또 한편으론 절제된 시어로 보다 울림이 큰 의미를 동시에 요구한다. 그런 탓에 우리는 오랫동안 책상 앞에 앉아 노동을 하듯 시를 깎고 다듬는 일에 열중한다. 그러나 위 시들은 그런 우리의 행위들과 좀 다르다.


조하연의 ‘흥, 치치’는 아무 꾸밈없는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일상을 아무 가미 없이 옮겨놓고 있다. 그러면서도 할아버지와 화자인 나와의 관계가 얼마나 가깝고 따뜻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시가 울림 큰 것은 인위적인 느낌을 주는 ‘할아버지와 저’가 아닌 ‘하부지와 나’라는 비작위 때문이다. 그런 탓에 시는 더욱 두 사람 간의 사랑의 거리를 긴밀하게 만든다. 특히 ‘막걸리’나 ‘흥 치치’ 같은 일상어가 리얼리티를 의미있게 부추긴다.



김양경의 ‘밥통’ 역시 아침잠에서 깨어나 아침 식사를 하기까지의 그 흔한 일상이 그대로 진술된다. 정신을 초롱초롱하게 차린 의식있는 행위가 아닌 ‘잠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 그 솔직한 순간의 에피소드여서 더욱 친근감이 느껴지고 재미있다. 작의가 느껴지지 않는 위의 두 편의 동시야말로 오랜 숙성 뒤에 ‘저절로 술술 풀려져 나오는’ 시를 닮았다.



그 외, 박예분의 ‘달렸다’는 엄마의 잔소리를 피해 집을 나와 여기저기 어슬렁거리다가 소나기를 만나 다시 집으로 들어가는 작위성 없는 자연스러움이 돋보였고, 신이림의 ‘몽당이 가족’도 노할머니집 몽당비, 몽당숟가락, 몽당연필, 몽당칼을 놓여있는 그대로 아무 사족 없이 보여주는 편안한 시다.



시와 일상의 분별을 떠나있는 동시, 물 흐르듯 쓰여진 동시야말로 시인의 시가 가 닿을 지고지순한 ‘그곳’이 아닐까 싶다.

돌아보니 ‘이 계절의 동시평’을 쓴지 6년이 지났다. 이제 어쭙잖은 저의 평문을 이쯤에서 끝낼 생각이다. 그 동안 동시를 쓰는 동업자의 입장에서 우리 동시를 마치 나의 동시를 들여다보듯 읽고 써왔다. 괜히 지면만 어지럽힌 것 같아 걱정이다. ‘이 계절의 동시평’을 읽어주신 독자님들과 <아동문학평론>에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