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몰려오는 아침
권영상
아침 창문이 덤덤하다. 아니나 다를까 창을 여니 자옥한 안개다. 안개가 내 얼굴을 훅 감싼다. 밤새 건조해진 몸이 촉촉해져 좋긴하지만 연일 안개는 싫다. 사람들 말로는 근방 저수지 때문이란다. 거기서 태어난 안개가 밤사이 들을 건너고 숲길을 걸어 마을로 찾아온단다.
한낮 기온이 오르면 이튿날은 영락없다. 내 고향 초당도 인근에 경포호수가 있어 봄이면 마을이 자오록하도록 안개가 몰려든다. 그래도 그게 싫지 않은 건 그들 떠난 뒷자리에 드러나는 살구꽃이나 복사꽃 풍경이 신비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볕이 귀한 늦가을은 좀 다르다. 호박이며 무 오가리를 말려야 한다. 그뿐인가 토란이며 햇고구마도 그렇고, 두어 이랑 심어 가꾼 콩도 볕에 충분히 말려 갈무리해야 한다. 가을볕에 바싹 말려두지 않으면 농약을 치지 않고 키운 곡물은 이내 곰팡이 먹이가 된다.
손톱만한 볕도 아깝고 손도 아쉬운 마당에 안개라니! 아침을 마치고 잠시 쉬다보면 보통은 안개가 사라지는데 요사이는 정오쯤에야 슬며시 달아난다.
이드거니 아침을 먹고 뽀얀 안개 마당에 나섰다.
“고물 삽니다. 고물. 못쓰는 냉장고, 테레비, 컴퓨터, 농기계.....”
안개를 뚫고 확성기 소리가 마을을 찾아온다. 가끔 이 시간이면 지나가는 고물 수집 트럭이다. 트럭은 보이지 않고 확성기 소리만 안개속에서 또박또박 날아온다. 마을이라 해 봐야 여섯 집이 전부인데 고물 수집차도 오고, 개 장수도 오고, 장독이나 유기그릇 장수도 온다. 때로는 옻칠밥상이나 차탁 장수도 온다.
동회에 석회비료를 받으러 가는지 옆집 아저씨가 오토바이에 시동을 건다. “아, 뭐해요. 얼른 오지 않구!” 오늘도 할 일이 많나 보다. 함께 사는 여자친구를 재촉하는 목소리가 안개 때문일까. 더없이 살갑다.
안개가 끼는 날에는 귀가 밝아진다. 키질하는 소리, 철대문 철컹 닫히는 소리, 개 짖는 소리, 학교 안 가냐? 그러는 어느 집 안주인의 말소리, 유치원 아이를 데리러 오는 승합차 엔진소리... 가만 보면 세상은 소리로 깨어나고, 소리가 그치면 고요한 밤이 된다.
촉촉한 안개 속에서 하기 좋은 일이 있다. 나는 낫을 찾아들고 지난 날, 과분하게도 호박을 잘 키워준 호박줄을 걷으러 나섰다. 한 생을 마친 호박줄은 물론 함께 자란 풀까지 알뜰히 모아 쌓아놓고 보니 적지않다. 유기농 거름을 켜켜이 넣고 그 위에 흙을 알맞게 눌러덮었다. 풀거름을 만들어 내년 봄 호박거름으로 다시 쓸 요량이다.
그 일을 마치고 돌아서는데도 안개는 여전하다.
비를 들고 마당에 떨어진 낙엽을 쓴다. 산딸나무인 줄 알고 산 중국단풍나무는 지붕보다 더 크게 자랐다. 여름날엔 그늘이 넓어 좋고, 바람이 지나가는 작은 소리에도 귀가 밝아 늘 수선을 떤다. 무엇보다 아침마다 쏟아내는 낙엽이 좋고, 낙엽 쓰는 일이 좋다.
마당에 내놓은 휴대폰 수신음이 귀에 또렷이 울린다. 먼 남쪽에 가 사는 벗이다. 반가이 그와 통화를 마치고 돌아서는 사이 안개가 걷히고 번쩍 볕이 든다. 세상이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다. 영화의 화면이 훅 바뀌는 것처럼 환해지면서 텃밭 둘레의 살비아꽃이 살아나고, 건너편 파란 지붕 집이, 그 너머 밤산이 살아난다.
빗자루를 놓고 서둘러 햇볕에 말릴 것들을 들고 나와 마루에 내놓는다. 시계를 본다. 11시. 밥솥에 앉힐 점심 쌀을 미리 씻어놓지 않았다. 왜 이리 밥때는 빨리 오는지.....
교차로신문 2019년 11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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