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사는 게 재미없고 답답할 때에

권영상 2019. 10. 14. 18:47

사는 게 재미없고 답답할 때에

권영상




아침에 일어나자, 알싸한 연기내가 창틈 사이로 타넘어 들어온다. 이 가을 아침에 무슨 일인가 싶어 문을 열고 나갔다. 길 건너 고추밭에서 김씨 아저씨가 고춧대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태운다. 연기가 뭉게뭉게 보기좋게 치솟는다.



고추밭 김씨 아저씨가 길 건너 앞밭에 고추를 심어 가꾼지 내가 알기로 6년이 넘는다. 그는 뭉게뭉게 오르는 연기 아래에서 고추 이랑 비닐 피복을 벗기고 또 한편으론 다음에 태울 고춧대를 쌓느라 분주하다. 저이가 이른 아침부터 저렇게 서두르는 걸 보면 무슨 궁리가 있는 게 분명하다.

아침 먹을 때쯤 밭 가는 경운기 소리가 나더니, 설거지를 마치고 나가보니 그 넓은 밭에다 씨앗을 뿌리고 있다. 물어보지 않아도 안다. 호밀씨를 뿌리고 있는 중이다.




3년 전에도 그이는 일찌감치 고추밭을 갈아엎고 호밀씨를 뿌렸다. 그때만 해도 뭘 모르던 나는 그의 그런 모습에 마음이 설레었다. 이듬해 봄쯤에 키가 장한 호밀숲을 보리라 해서였다. 호밀은 별나게 키가 큰 작물이다. 키가 큰 만큼 작은 바람에도 물결을 이루며 파도처럼 흔들리는 모습은 나름대로 멋지다. 나는 심심할 때마다 그런 장관을 즐기며 살리라 하며 내심 즐거워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봄이 오자, 정강이쯤 자란 호밀들을 일시에 갈아엎었다. 내 생각으로는 고추밭 거름을 하려고 저러는 모양이구나 했다. 그러나 텃밭 고추 두 이랑을 내 손으로 직접 내리 3년을 심어보고야 알았다.

거름도 거름이지만 그건 연작 피해를 막기 위해서였다.

사는 게 지루하고 재미없고, 가슴 답답해 어디 먼데 바람이라도 쐬고 오고 싶다는 말을 가끔 아내에게 듣는다. 어디 먼 곳이 괜히 그립다는 거다. 그럴 때마다 느끼는 건 내게도 그럴 때가 종종 있다는 거다. 괜히 사는 게 싫증나고 웬만한 말이나 일에도 참지 못하고 투정부릴 때가 있다.



사람만일까. 한 자리에 눌러사는 작물들도 마찬가지다. 토마토 가지 대파 토란 등이 그렇다. 내 경험에 제일 심한 것이 고추다. 고추는 한 자리에 2,3년 이상 눌러사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아무리 좋은 밭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어도 꽃 피우고 열매 맺는 일을 귀찮아한다. 결국 고추는 시름시름 병충해를 껴안고 사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생을 마친다. 그게 연작 피해인 걸 모르고 이듬해 그 자리에 또 고추를 심으면 어찌 될까. 그 결과는 뻔하다.

날아다니는 짐승들도 연작을 싫어한다. 아무리 잘 지은 둥지도 한 해 이상 살지 않는다. 이듬해 봄이 되면 과감히 둥지를 버리고 새 둥지를 짓는다.



고추밭의 김씨 아저씨가 호밀을 심는 까닭도 연작으로 생기는 장해나 피해를 줄여보기 위한 방책이다. 자연인들이 산속에 숨어들어 절망적인 병을 치유하고 살아나는 건 산 때문이 아니다. 어쩌면 삶의 연작 피해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같은 직장, 같은 업무에 매달려 사는 일은 연작 피해를 부른다. 어디 가나 일률적이고 비슷비슷한 도시환경과 주거환경 역시 연작 피해를 불러오기에 충분한 조건들이다.



잘 나가던 시인이나 작가가 어느 날 잊혀지고 만다면 그 역시 연작 피해에 희생되었다고 보면 맞다. 연작 피해란 다른 말로 타성이다. 작가가 타성이라는 질병에 걸렸다면 그건 치명적이다. 타성은 작가의 날카로운 눈을 빼앗아 가는 질병이기 때문이다. 타성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간단하다. 과감하게 자신의 구조를 한번 바꾸어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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