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마지막 가을선물

권영상 2019. 9. 28. 13:59

마지막 가을선물

권영상




산길을 오르는데 길옆 풀숲에 알밤 하나가 떨어져있다. 방금 떨어졌는지 붉고 윤기 도는 말쑥한 밤이다. 밤을 집어 들며 고개를 쳐들었다. 밤나무 한 그루가 우두커니 서 있다. 나는 밤나무 밑을 돌며 세 톨을 더 주웠다. 바지주머니에 넣으니 불룩하다. 산을 다 오른 뒤 집으로 돌아오며 바지주머니 속에 든 알밤을 꺼내어 손에 꼭 쥐어본다.



10여 년 전의 그 날이 떠오른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대관령을 넘어 고향을 향했다. 어머니는 바다가 보이는 종합병원에 입원해 계셨다. 이런 일이 그 해 들어 두 번째였다. 그 날은 격리병실에 들어가시게 되어 있어 나는 어머니 곁에 오래 앉아 있었다. 늙으신 어머니는 산소 호흡기에 의지하시느라 말씀도 못 하셨고, 귀로만 간신히 의사가 소통되는 정도였다.



어쩌면 이 길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불안한 마음이 일었다. 그때 어머니 연세는 아흔 일곱. 아버지 떠나신지 20여 년이 되어가는 무렵이었다. 병실 창밖을 내다보니 병원 바깥 작은 둔덕에 마타리꽃이 드문드문 노랗게 피어있었다.

왠지 어머니와의 작별이 가까워진다는 위기함이 자꾸 들었다. 나는 어머니를 보내드릴 마음의 준비도 할 겸 병원문을 나섰다. 소나무 숲 저 너머로 파란 가을 바다가 보이고, 그곳으로 내려가는 오솔길이 보였다. 가을 물빛 오솔길이 나를 불렀다. 나는 천천히 오솔길의 손짓을 따라 그 길을 걸었다. 내 눈에 들어오는 들꽃이며 조각돌이며 나무들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게 보였고, 그들이 내뿜는 작은 향기조차 너무나 특별했다.



젊은 날의 어머니는 마음고생이 심하셨다. 내 위로 두 분 형님은 모두 건강이 좋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아버지의 그 많은 농사일을 함께 거들면서 여섯 자식을 키우고 또 그 여력으로 농토를 넓히셨다. 그러던 중에 독한 가정사를 만나 어머니는 무려 16년 동안을 병원에 의지하여 지내셨다. 그러느라 어머니는 나의 소년기를 모르는 채 병원에서 고독히 투병하셨다.



어머니가 즐겨 읽으셨던 ‘박씨부인뎐’의 박부인이 천상의 죗값으로 받아온 못난 얼굴의 허물을 때가 다 되어 벗어던지고 새 어엿한 여인의 모습으로 환생하였듯 어머니도 오랜 뒤 병석을 털고 일어나셨다. 그후 어머니는 나를 돌보지 못하신 것에 대한 고민이 있으셨던 듯하다. 내가 성장하여 자식을 낳아 키우던 어느 날, 우리 집에 오신 어머니는 내가 아닌 아내에게 내게 줄 선물을 남기고 가셨다. 어머니께서 손수 필사하신 고전소설 ‘박씨부인뎐’과 어머니가 서한을 보내실 때마다 쓰시던 작은 벼루와 먹과 붓이었다. 어쩌면 그건 내심 어머니가 내게 못 해주신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 같아 속이 저렸다.



나는 그때의 그 어머니를 생각하며 오솔길을 걸었다. 그때 내 앞에 오늘의 일처럼 붉은 알밤들이 밤나무 아래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 나는 알밤들이 아까워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줍다가 말고 다 내려놓고 토실한 밤 하나만 집어들고 일어섰다.

그길로 돌아와 병상에 누워계신 어머니 손에 그 알밤을 꼭 쥐어드렸다. 그 어떤 세상에서 다시 만나더라도 밤을 쥔 분이 내 어머니라는 징표를 만들어 드리듯이. 그런데 그게 이 지상에서 어머니에게 드리는 마지막 선물이 되고 말았다. 어머니는 그 가을 내가 드린 알밤을 쥐고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가셨다.



어머니가 홀로 떠나가신 그 옛날의 가을이 불현 떠오른다. 길은 달라도 이 가을, 붉은 알밤을 손에 쥐고 나는 이 이승의 길을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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