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거미줄에서 배우는 일

권영상 2019. 9. 16. 11:24

거미줄에서 배우는 일

권영상


 


일 주일만에 안성에 내려왔다. 파밭골 여기저기 풀이 났다. 괭이를 꺼내려 쟁기 두는 창고에 가려는데 뭔가가 내 얼굴을 휘감는다. 거미줄이다. 일주일 집을 비웠더니 그걸 어찌 알고 그 사이 거미줄을 쳐놓았다. 거미줄을 걷어내려다 한 발 물러섰다. 파란 허공에 지어놓은 거미줄이 멋지다. 책에서 가끔 보던 그 방사형의 넓고 번듯한 집이다.



이쪽 줄은 처마 끝과 창고로 들어가는 문틀에 묶여있고, 저쪽 줄은 이쪽에서 한 3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밭머리 단풍나무 우듬지와 아래쪽 가지에 묶여있다. 그러니까 거미줄은 우리집 과 저쪽 단풍나무 사이의 넓은 공간에 쳐져있다. 집을 지키는 거미가 거미집 한가운데서 엉덩이를 들어올린 채 웅그리고 있다. 좀전 거미줄에 걸린 내 얼굴 때문에 놀란 모양이다. 그 댁 주인은 낯에 익은 호랑거미다.



거미도 지금 놀라고 있겠지만 나도 지금 놀라고 있는 중이다. 흔한 게 거미줄이지만 이렇게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지어진 거미줄을 감탄할 정도로 지켜보는 일은 정말 처음이다. 내가 감탄하는 것은 집터를 볼 줄 아는 거미의 안목이다.

내가 보기에도 여기가 명당이다.

거미가 잡은 집터는 바람이 오고가는 유일한 통로다. 이쪽은 집이고 저쪽은 단풍나무 소나무 편백이 둘러쳐진 울타리다. 그러니 이곳이야말로 바람이 지나다니는 열려 있는 길이며, 동시에 날벌레들이 건너다니는 유일한 길이다. 거기다 뒷집 처마엔 밤이면  늘 외등이 켜진다. 그러니 당연히 날벌레들이 이쪽에서 그쪽으로 모여들 테고 모여들려면 이 병목을 통과해야 한다. 거미는 이 병목을 보고 여기에 집을 지었다. 명당이 아니고 무언가.



내가 더욱 놀라는 건 그런 결정적인 공간을 보는 거미의 조감 능력이다. 날개가 있다면 날아올라 주변 지형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테고, 성큼성큼 걸을 수 있다면 여기저기 걸어나가 멀찍이서 지형을 한 눈에 판단할 수 있을 테다. 그러나 불행히도 거미가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은 기어다니는 것 뿐. 거미는 어떻게 이 넓은 공간을 조감할까.



집을 지으려면 우선 거미줄을 펼칠 몇 개의 근간에 되는 줄이 문제다. 이쪽 줄을 처마 끝과 문틀에 묶고, 저쪽을 단풍나무 우듬지와 아래 가지로 선택하는데엔 통찰하는 눈이 필요하다. 보통 알기로 거미는 농경민처럼 한 군데 정착하여 사는 부류가 있고, 유목민처럼 돌아다니며 사는 부류가 있다. 돌아다니며 사냥하는 거미들은 자연히 눈이 발달 되었고, 거미줄을 쳐놓고 사냥하는 거미는 눈보다 발 끝에 전해지는 진동에 민감하다. 그렇다면 이 정착민의 주인인 호랑거미는 유독 시력이 뛰어나다는 건가.



알려고 하면 할수록 어린아이처럼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줄은 어떻게 치는가. 이쪽 처마 끝에서 3미터나 되는 저쪽 단풍나무 우듬지로 건너뛴다는 걸까. 아니면 공기와 접촉하는 순간 끈끈해지고 단단해진다는 끈끈한 줄을 풀며 처마끝에서 내려와 수돗가를 지나고, 풀밭을 건너고, 한창 자라고 있는 당귀 고랑을 건너 단풍나무를 타고 우듬지로 올라간다? 생각할수록 내가 철모르는 소년같다.



근데 잠깐이나마 거미줄을 보며 배운 게 있다.

전체적인 상황을 조망하고 판단하는 거미의 안목이다. 우리 사는 세상엔 큰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사사건건 마치 그 상황을 다 아는 것처럼 목소리를 높인다. 그때마다 쉬운 대로 그들의 판단에 휩쓸리거나 휘둘리는 나를 본다. 습관이 되어 불쾌함을 모른다. 내 삶과 먼 일엔 오히려 묵묵히 살고 싶다. 거미 보기에 부끄럽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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