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아내가 서 있던 자리

권영상 2019. 11. 15. 21:07

아내가 서있던 그 자리

권영상




우체국에 볼일을 보러 나갈 때다.

베란다 화분에 물을 주던 아내가 물그릇을 손에 든 채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본다. 아파트 마당에서 애들 축구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걸 보고 있으려나 했다.

우편물을 들고 집을 나섰다. 책 한 권을 부치려 해도 직접 우체국으로 가야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그런 까닭에 보낸다 보낸다 하다가는 그만 잊기 일쑤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가 안 보인다.

아침에, 요양원 계신 엄마를 보러갈까, 하던 말이 생각났다. 이 방 저 방 찾아봐도 없다. 간다는 말없이 그냥 간 모양이다. 찾아가 뵈어도 이제 장모님은 찾아온 사람도 모르고, 목소리를 높여 말해도 그 말을 못 듣는, 아무 의식이 없는 상태다. 요양원이 집에서 좀 멀어 자주 찾아뵙는 일이 실은 어렵다. 엊그제 다녀왔는데 또 찾아뵈러간 모양이다.

갑자기 집안이 빈집처럼 고요해진다.



나는 일없이 베란다로 나갔다. 거기 아내가 화분에 물을 주다말고 창밖을 내다보던 곳에 가 섰다. 건너편 아파트 느티나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잎이 물들어 노랗다 못해 붉다. 이제는 계절이 겨울 근처에 와 있다. 앞동 아파트 벽이며 유리창이 붉게 물들어 환하다. 나무의 생애로 친다면 절정이다. 내일 비 온댔으니 이 비 오면 저 고운 느팃잎들도 다 떨어지고 말겠다.

바람이 슬몃 지나가는지 느팃잎들이 이따금씩 우수수 떨어진다.

아, 저걸 보고 있었구나!



바람에 우수수 지는 느팃잎을 보며 아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홀로 요양원에 누워계신 엄마를 생각했을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 생각이 맞을지 모른다. 은평구에 있는 요양원에 장모님이 들어가 계신지 벌써 7년이다. 그 절반은 걷지는 못하셔도 한두 마디 말씀은 하셨다. 그러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말씀도 잃고, 눈은 뜨지만 의식이 없다.

올 6월은 장모님의 백수 생신이었다. 새삼스럽지만 백수란 사람 나이로 100세라는 말이다. 더 쉬운 말로 세상에 태어나 백 년을 사셨다는 말이다. 백년이 오래인 듯 하지만 자식 입장에선 그게 또 그리 긴 세월이 아니다.



단짝인 친구와 여행 중에 단짝친구 어머니가 돌연 돌아가시는 걸 본 후로, 아내는 어디 멀리 갈 일이 있으면 힘들어도 떠나기 전에 꼭 한 번 찾아뵙는다.

“간밤 꿈이 안 좋았어.”

오후에 볼일이 있어 강릉으로 떠나려니 아내의 머릿속이 또 불안해지는 모양이었다. 요양원 다녀오는 데만도 3시간이 걸린다. 잠깐 앉아있다 오려면 5시간은 걸릴 터인데도 굳이 가는 까닭은 다시 못 볼까 그 두려움 때문이겠다.

남들 다 가는 단풍 구경, 우리도 한 번 가보자! 그런 말 했을 때도 아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한때는 가을 단풍을 좋아했는데 언제부턴가 가을 단풍을 보면 늙어가는 생애가 안타까워진다고 했다. 더듬어 보면 장모님이 요양원에 들어가신 그때부터인 듯하다.



자식 아홉을 낳고 힘들여 키우시느라 장모님은 고달프셨을 테다. 아내도 나이를 먹었으니 사람이 하는 작별을 몰라 저러는 것이 아니겠다. 입 밖에 안 내지만 한 세상을 사느라 겪을 것 못 겪을 것 다 겪고 가시는 엄마의 생애가 슬퍼 저러겠다.

어디선가 새 한 마리 날아와 느티나무에 앉는다. 그것조차 무거워 또 한 무더기의 느팃잎이 쏟아진다. 아내가 서 있던 자리를 두고 방에 들어선다. 좀 춥다.


교차로신문 2019년 11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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