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꽃이 피는 저녁
권영상
퇴근 무렵이면 분꽃이 피지요.
땅거미가 질 무렵에 피는 분꽃은 낮에 피는 꽃보다 향기가 더 매혹적입니다. 여인이 쓰는 가장 고급스러운 향수가 어쩌면 분꽃 향이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여름이 막바지에 이를 때면 그곳에도 분꽃이 가득 폈지요. 그곳이란 제가 출퇴근하던 길입니다. 제 직장은 서울의 꽤 높은 언덕배기에 있었습니다. 출근을 하자면 회현역에서 공덕 네거리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하지요. 버스는 많았지요. 직장 정문 앞에 내려주는 마을버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뭔 고집인지 높은 언덕길을 걸어 오르내렸습니다. 큰길 이면엔 좁다란 골목길이 있었지요. 그 길을 사이로 봉제공장이 마주 보고 있었고, 거기에선 늘 라디오 소리가 미싱소리 보다 더 크게 들렸지요. 길갓집 민가의 담장은 나트막했지요. 그 나트막한 담장 위엔 선인장, 군자란, 달래, 무릇, 붓꽃 등의 화분들이 쪽 놓여있었지요.
“엄마, 찬장 속 고구마 먹어도 돼?”
퇴근길 골목에서 듣던 어느 집 아이의 목소리는 정겹다 못해 내 허출한 뱃구레를 자극하곤 했지요.
그렇게 걸어 내려오는 골목길가엔 담장 위에 올려놓지 못한 화분들이 내려와 있습니다. 주로 커다란 꽃 화분입니다. 칸나, 달리아, 접시꽃이나 치자나무, 그도 저도 아니면 분꽃들이 많았습니다. 화분의 크기는 담장 위에 놓아두는 화분들과 비교가 안 됩니다. 김칫독만큼씩 큰 탄탄하고 둥그런 고무통들입니다.
거기에 분꽃씨 하나 묻혔다 하면 이건 골목길이 터지라하고 가지를 치고 또 쳐 푸른 분꽃 숲을 이룹니다. 다들 단층이거나 옥상이 있는 낮은 집들이니 햇빛이 얼마나 좋겠어요. 여름내내 그 실하고 좋은 햇빛을 양껏 받아먹고 자란 분꽃들이라 한번 꽃 피기 시작하면 셀 수 없이 많이 핍니다. 주로 노랗거나 빨갛거나 빨갛고 노랗거나 노랗고 빨갛거나.
꽃은 제 천성대로 저녁 무렵, 세상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피기 시작하지요.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산 너머로 해가 이울고 그 자리에 저녁별이 돋을 무렵이지요. 분꽃은 이 세상의 시간으로 피는 게 아니고 밤하늘별의 시간으로 꽃을 피우지요. 새벽, 별이 질 무렵이면 그 좋던 분꽃도 별을 따라 지고 말잖아요.
이런 분꽃 피는 골목길을 그냥 평지 걷듯 걸어내려 갈 수야 없지요. 아무리 허기질 시간이라 가는 길이 급하다 해도 꽃향기 한 번씩은 맡아보고 가주는 게 도리지요. 혼자 맡는 것도 좋지만 골목길에서 만나는 할머니, 또 거기 노는 아이들과 같이 맡으면 더욱 꽃향기가 맛나고 재미있지요.
꽃 냄새를 맡으며 묻지요. “꽃 향기 어때요?”하고. 그럼 다들 와! 향수 같아요. 디게 진해요, 그러지요. 그런 중에 또 어느 분은 "별에서 본 지구의 저녁 무렵이 떠올라요." 그런 말도 두고 가지요. 그분은 정말 어느 별에서 일몰을 보고 내려온 사람일지 모릅니다. 밤마다 별과 가까이 사는 이 언덕배기 동네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별과 친할 테니까요.
“저기 국어선생 분꽃내 맡으며 퇴근한다.”
이층으로 오르는 옥외 계단에 앉은 할머니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저녁 인사를 하십니다. 나는 그분들을 향해 꾸벅 인사를 드리고는 골목길을 꺾어 돌아갑니다. 골목길에 향기 나는 꽃화분을 놓아두고 사실 줄 아는 언덕배기 사람들.
요즘도 해질 무렵 분꽃 앞에 서면 그분들의 정겨운 목소리가 그립습니다.
<교차로 신문> 2019년 8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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