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나도
권영상
나도 잘 나갈 때가 있었다.
그땐 일 년에 창작집을 세 권씩이나 냈다. 직장을 다니면서 남들 못할 일을 해냈다. 다른 일을 게을리했냐면 그것도 아니다. 직장 일은 직장일 대로 부지런을 떨었고, 술은 술대로 마시면서 틈을 만들어 글을 썼다.
그때 나는 퇴근을 집 아닌 인사동으로 했다. 거기 이모집 툇마루 맥주광장이 내 집이었다. 한자리 잡고 앉으면 글쟁이들이 다 모였다. 글쟁이들이 모여드니 편집자들도 모여들었다. 대개 출판사 신입, 송별은 그런데서 이루어졌다.
술을 마시러 모여들었으니까 술은 한 차례로 끝나는 법이 없었다. 이 집 저 집 들러 낙원동 포차에 가서야 그쳤다. 그때가 자정을 넘긴 이슥한 1시.
술에 취한 몸으로 간신히 택시 잡기에 나선다. 낙원동에서 밀리면 광교로, 광교에서 밀리면 종로 2가, 거기서 밀리면 삼일빌딩까지 가서야 택시를 얻어탄다.
집에 돌아가면 대개 새벽 2시.
새벽 2시에 자도 아침 6시면 어김없이 일어났다. 적어도 7시 20분 아침 직장 일에 대어야 했다. 일상이 늘 그랬다. 그래도 피곤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글은 대개 주말이거나 방학을 이용해 썼다. 짬을 내어 도막잠을 자듯 짬을 노려 글을 썼다.
원고가 출판사에 걸리면 출판할 때까지 적어도 서너 번은 만난다. 지금은 이메일과 문자메시지가 있어 한번쯤 그저 인사삼아 만나지만 그때는 달랐다. 모든 일은 만나 이야기하면서 고치고 바꾸어나갔다.
그럴 때면 조금 소란한 인사동보다는 하루 일과가 끝난 직장의 내 공간이었다. 서울이어도 내 직장을 찾아오는 일은 힘들다. 전철로 회현역에 내려 버스로 남대문 고가도로를 타야한다. 만리동 언덕쯤에 직장이 있었다. 어디서 출발하든 적어도 마지막엔 택시를 타거나 버스를 타야 한다. 편집자들은 백이면 백 모두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손수건으로 턱밑의 땀을 닦으며 찾아왔다.
일이 끝나면 대개 나는 그들을 위해 저녁을 사주었다. 내가 그들보다 나이가 많았고, 무엇보다 그 먼데를 찾아와준 노고가 고마웠고, 그들이 딸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저녁을 든든히 먹여 음식점을 나올 때면 나는 이 말을 잊지 않았다.
“차비 해 가세요.”
그러고 지갑에서 천원을 꺼내 손에 쥐어 주곤 했다.
돈이란 천원짜리 한 장이어도 느낌이 다른 모양이다. 한사코 손을 내젓는다.
“너무 적어서요? 더 드릴까요?” 하면 내젓던 손을 거두고 낯간지러운 내 돈 천원을 마지 못해 받는다. 예전, 어머니는 집에 찾아오는 이를 빈손으로 보내시는 법이 없었다. 시골이니까 하다 못해 담장 위에 크는 호박 하나라도 뚝, 따 드렸다.
호박이 없으니 나는 천 원을 내민다.
재미있는 건 그분들이 회사로 돌아가면 꼭 그 천원에 대한 메일을 보내온다는 것이다.
‘아버지한테 용돈을 받은 기억이 있어요. 그런 탓인지 아버지를 뵙고 온 기분이었어요.’ 내가 건넨 돈 천 원에서 그들은 대체로 아버지를 느꼈다.
그때는 좀 젊어 내가 하는 행동에 스스로 제약을 가하지 않았다.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런 까닭에 천 원을 내밀면서도 부끄러움을 몰랐고, 새벽에 귀가하면서도 미안함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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