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벗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그리며 글 이해인 수녀님 | |
깨끗이 세수를 하고 거울을 들여다본다. 단정한 내 앞모습이 거기 있다. 그러나 그때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거울 속에 뵈지 않는 내 뒷모습이다. 외로울 때 나의 뒤에서 뒷힘이 되어주던 뒷모습 거기 혼자 있는 뒷모습이 보고 싶다. 거울을 볼 때마다 권영상 <뒷모습>
사랑하는 벗, 임채엽 수녀님.
이 동시를 읽고 나니 새삼 뒷모습의 아름다움을 묵상하고 싶어서 어떤 유명한 사진가가 여러 사람들의 뒷모습만 찍어서 만든 사진집을 방에 갖다 두고 보는 중이에요.
침방에서 성당으로, 성당에서 식당으로 움직일 때, 그리고 정원에서 산책할때 요즘은 더 유심히 우리 수녀님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곤 합니다. 뒷모습이 곧은 수녀들도 있지만 노년의 아픔으로 등이 굽어있는 수녀, 뼈의 이상으로 한쪽으로 어깨가 치우쳐 있거나 목이 자꾸만 뒤로 젖혀지는 수녀들도 있습니다. 나도 뒷모습의 자세가 좋지 않은 편에 속하지만 그래도 얼마 전에 두 무릎 수술을 하고 나서는 키도 조금 더 큰 것 같고 자세도 좀 바르게 된 것을 걸음 걸을 때마다 스스로 느낍니다.
한 때는 크고 작은 공동체의 책임자였던 수녀님이 이제는 파트타임으로 원내의 유치원에 나가 어린이들을 만나며 새로운 기쁨을 체험한다고 하였지요? 아이들에게 ‘요리박사’로 통한다는 수녀님을 위해 나는 재미있는 요리용 그림책들을 선물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지금은 내 옆의 옆방에 살고 있는 수녀님은 지금도 밖의 잔디밭에서 잡풀을 뽑고 계시네요. 그 부지런함으로 수녀님은 어질러놓고 미처 치우지 못한 내 침방 정리도 해주고 출장 가고 없을 땐 빨래와 다림질도 해주어 너무 미안해하면 늘 괜찮다고 말합니다.
어쩌다 몸이 힘들어 공동 기도 시간에 빠지고 누워 있으면 밥은 챙겨먹었느냐 걱정하며 과일이라도 들고 오고 외부 강의를 나갔다가 들어와 허전한 마음을 혼자 달래고 있으면 분위기가 어땠느냐고 잠시 방에 와서 물어보고 가곤 했습니다. 그것이 저에겐 항상 작은 위로가 되어주었지요.
내 어머니가 살아계실 적엔 부산에 있는 나를 대신해 경기도에서 서울까지 전철을 타고 밑반찬을 해서 갖다 주던 우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핑 돌만큼 감사합니다. 늘 너그럽게 대해 주다가도 충고가 필요할 땐 빙빙 돌려서 말하지 않고 직선적으로 말해 주는 멋진 친구인 수녀님. 아주 오래 전 수련기를 막 끝낸 새 수녀 시절, 내가 유학을 떠나기 전에 “누구에게 습관적으로 의존하지 말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은 자기가 해야 한다”라고 한 그 말이 나에겐 무척 도움이 되었습니다.
내가 수녀님의 영명축일이나 특별한 기념일에 적어 보낸 카드나 메모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수십 년 만에 보여주어 나를 놀라게 했던 수녀님,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위지만 수도서열은 나보다 조금 아래라 슬쩍 반말을 해도 괜찮은 우리 수녀님, 서로 다른 성격으로 한때는 조금 삐걱거리던 때도 있었겠으나 입회동기 열일곱 명 중에 유일한 동기로 남은 단짝 ‘남해아가씨’ 마르첼리나 수녀님, ‘외로울 때 나의 뒤에서 뒷힘이 되어주던 뒷모습’이란 구절에 한참을 머물다가 수녀님이야말로 나에게 뒷힘이 되어주는 좋은 친구라는 생각이 오늘은 더욱 새롭네요.
돌아가신 어머니가 임종하시기 며칠 전 내 꿈속에 분홍스웨터를 입고 빈손으로 훠이 훠이 걸어가시던 그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던 우리 수녀원 입구엔 지금 목백합이 무성하네요. 거의 처음으로 내가 다리 아픈 걸 핑계로 수녀님 손을 잡았을 때 “생각보단 손이 탄탄하고 힘이 있네”라고 했지요? 우리 중 누가 먼저 떠날진 모르지만 언젠가는 수도자의 뒷모습을 보이며 이승을 하직할 때까지 서로를 더 알뜰히 사랑하고 챙겨주는 좋은 도반이 되기로 합시다.
한결같은 우정과 사랑 안에서 감사를 드리며 오늘도 안녕히!
이해인 부산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수녀회에서 몸담으며 수도자의 삶과 작가의 길 속에서 기쁨을 찾는 수녀 시인입니다. 1976년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출간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다수의 시집과 산문집 《꽃이 지고나면 잎이 보이듯이》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 《기다리는 행복》 등을 냈습니다. <샘터> 2019년 8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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