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동시’라는 엉뚱한 장르를 생각하며
권영상
어린이들이 주된 고객인 가족뮤지컬이라는 장르가 있다. 처음엔 왜 어린이뮤지컬이 아니고 가족뮤지컬일까 했다. 그러나 어린이만을 고객으로 하는 뮤지컬이란 있을 수 없다는 거다. 뮤지컬이란 대개 공연장을 통해 공연되는 장르인데 어린이가 혼자 그곳까지 가는 건 무리며 혼자 관람하거나 귀가하는 것도 무리다. 어린이의 뮤지컬 관람은 그 점에서 가족 동반이 필수적이다. 가족뮤지컬은 가족이 함께 본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쓰고 있는 동시도 그 유통 경로가 이와 유사하다. 동시집 구매 과정에도 가족이 동반된다는 특성이 있다. 출판 불황이라 동시집 출판도 힘들고 또한 동시집 구매 비용도 점점 높아간다. 가족 3인 중 어린이 한 명을 위해 동시집을 사드는 일은 그리 쉽지 않겠다. 그러나 동시집 한권이 가정에 들어가 가족 모두와 가까워진다면 비용에 대한 부담은 낮아질 수도 있다. 가족 구성원이 함께 읽고, 함께 공감하고, 대화하고, 외거나 읽어주며 즐길 수 있는 동시를 ‘가족동시’라 규정지어 본다면 그 발상이 너무 엉뚱할까.
어린이 뮤지컬이 가족 뮤지컬이 되려면 어른도 극중에 빠져들 만큼 스토리가 탄탄해야할 것이다. 물론 생생한 무대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이 실감나는 안무와 감미로운 노래도가 필요하다. 어린이와 부모 또는 조부모까지 다 함께 즐길 수 있는, 웃음을 자아내거나 탄식하거나 감탄하거나 박수칠 수 있는 내용이라면 더욱 좋겠다.
그렇다면 가족동시는 적어도 어떠해야 할까.
우선 어린이를 위한 시이면서 동시에 엄마 아빠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시가 되어야할 테다. 그런 점에서 가족 구성원이면 겪게 되는 관심사, 더 나아가서는 사회문제, 또는 보편적인 인생의 의미를 생각케 하는 동시면 좋겠다.
거기에다 동시가 갖는 특유의 단순성과 명쾌함, 참신성을 갖춘다면 더욱 좋겠다. 이쯤 되면 가족 모두가 두루 읽고 두루 즐길 수 있는 가족동시가 되지 않을까.
좀 허술하긴 하지만 오늘은 ‘가족동시’에 대해 조심스럽게 첫 삽을 떼어보려 한다.
1. 산뜻한 혁명
길바닥에 말라붙은 벌레/ 까치가 그걸 먹고 멋지게 날아간다// 저런 걸 먹고/ 저렇게 신이 날까
-김창완의 ‘까치’ 전문 <동시마중> 2019년 5,6월호
느티나무가 많이 아픈가 보다/ 매미가 저렇게 우는 걸 보면// 얼마나 아픈지/ 나무 아래가 흠뻑 젖었다
-김유석의‘그늘’전문 <어린이와 문학> 2019년 6월호
이 정도의 동시라면 어린이는 물론 세대가 다른 엄마나 아빠 또는 할머니의 공감도 살 수 있지 않을까. 두 편 모두 짧고 간결하면서도 아, 세상에! 이런 놀라운 생각도 있구나 싶은 참신성을 지니고 있다.
김창완의 동시 ‘까치’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단번에 탁, 깨뜨린다. 우리의 고정관념이란 음식을 먹어도 괜찮은 음식점에서 고가의 그럴 듯한 음식을 먹어야 그 행위가 멋지고, 그래야 신이 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시는 그 생각을 한 순간 날려버린다. 길바닥에 말라붙은 벌레를 먹고도 저렇게 멋지게 날아가는 까치 때문이다. 어린이는 물론 어른들조차 끔찍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기쁨을 맛 볼 수 있겠다.
김유석의 ‘그늘’역시 예사롭지 않다. 매미가 우는 게 제 몸이 아파 우는 게 아니라 기대어 사는 느티나무가 아프다고 보는 발상부터 그렇다. 타자를 생각하고 염려하는 매미를 통해 나를 먼저 생각하는 나를 돌아보게 한다. 느티나무를 위해 매미가 얼마나 울어주었는지 나무 아래가 흠뻑 젖었다는 이 표현은 그늘의 은유다. 이 은유의 깊은 아름다움이 시 전편에 잔잔히 깔려있어 시 공부를 하지 않은, 또는 공부를 했더라도 다 잊은 이들에게 충분히 시의 감성을 고조시킬 수 있는 시다.
2. 공동체 이야기
그 나라는/ 아기 울음소리가 줄어들고/ 아기 울음소리 대신/ 아기를 닮은 고양이 울음소리/ 강아지 울음소리로/ 채워지고 있단다// 점점 그 나라는/ 사람들 손에/ 걸음마 배우는 아기가 아닌/ 촐랑촐랑 강아지 줄이 쥐어져 있고/ 따뜻한 품에서/ 쌔근쌔근 고양이가 잠자고 있단다// 한 50년쯤 후에는/ 강아지, 고양이들이 차렷, 경례! 군대를 가고/ 야옹, 멍멍! 하며 사무실에서 톡톡톡 워드를 치고 있겠지.
-윤삼현의 ‘어떤 나라는’ 전문 <동시먹는 달팽이> 2019년 여름호
윤삼현의 ‘어떤 나라는’어느 특정 지역의 이야기나 어느 특정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있는 우리 공동체의 문제다. 그 점에서 이 시는 어린이나 어른, 자식이나 부모 세대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공동 관심사의 성격을 지닌다. 앞으로 50년 후에는 강아지와 고양이들이 군대에 가고, 그들이 사무실에서 사무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시적 상상은 자식 대신 반려동물을 키우는 우리 사회의 모순을 시니컬하게 보여준다. 가족이 둘러앉아 이 시를 읽는다면 꽤 괜찮은 대화가 오랫동안 가능하겠다.
3. 인생 또는 인간을 배운다
노란 개나리 그림자를 노랗게/ 빨간 장미꽂 그림자를 빨갛게/ 초록 느티나무 그림자를 초록으로/ 만들지 못한 일// 얼룩말 그림자를 얼룩얼룩/ 점박이강아지 그림자를 점점이/ 내가 입은 알록달록 원피스 그림자를 알록달록// 절대 만들지 못한 일
-한상순의 ‘해님도 어쩌지 못하지’ 전문 <동시발전소> 2019년 여름호
선생님,/ 저희 엄마의/ 엄마의 엄마가 그랬듯이/ 저도 와서 잘 마시다 갑니다// 곤히 주무시고 계셔서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리고 먼저 일어나네요// 왔다갔다는 표시로/ 잘 마셨다는 표시로/ 빨간 점/ 하나/ 두고 갑니다// 저희 아이들도 잘 자라면/ 저희 엄마의/ 엄마의 엄마가 그랬듯이/ 또 제가 이러듯이/ 신세를 지겠지요// 선생님,/ 그 점/ 매번 감사드립니다./ 그러니/ 이번 여름도 잘 부탁드립니다// -빨간집모기 올림-
-김성진의 ‘감사의 표시’ 전문 <열린아동문학> 2019년 여름호
두 편 모두 그 바탕에 인생에 관한 이치나 질서가 담겨있다.
한상순의 ‘해님도 어쩌지 못하지’는 우리가 익히 알아온 당연한 사실의 진술이다. 모든 사물의 그림자는 그 사물의 빛깔과 상관없이 다 검다는. 그러나 그 밑에는 강력한 태양조차도 이 세상에는 절대 못하는 일이 있다거나 모든 사물의 실체는 평등하다는 진리가 깔려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해 줄 수 있는 만용이나 허세에 대한 경고를 이 시가 대신하고 있다.
김성진의 ‘감사의 표시’는 흡혈을 하고도 감사의 인사를 못하고 떠난 ‘빨간집 모기’의 익살스러운 서간이다. 이 시를 읽으면 가족 누구나 한번쯤은 낄낄낄 웃을 거다. 그렇게 한번 웃겨보자는 뜻도 있다. 그러나 그것뿐인가. 그렇지는 않다. 엄마의 엄마들이 살면서 오랫동안 그래 왔듯이 신세진 분에 대한 깎듯한 감사 표시 예법을 다음 세대에게 보여주거나 물려주는 유머러스한 시다. 어찌 보면 그 모습이 정결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 점에서 가족 간의 소통을 더욱 원활하게 하는 가족동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가족동시로 적절했던 시들이 또 있다. 문삼석의 ‘찻주전자와 찻종지’, 김현숙의 ‘신입 사원 모집’, 김성민의 ‘거미집’, 진복희의 ‘봄 캐러’, 이묘신의 ‘별똥별’ 등이 그것이다. 인용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아동문학평론> 2019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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