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에 심은 동시나무 구옥순 시인>
도롱이 속 주머니나방애벌레의 꿈
권영상
2010년 10월 9일.
한국아동문학인협회 세미나가 경주에서 있었다. 정확히 경주교육문화회관. 버스를 타고 세미나 장소에 도착한 나는 세미나실에 짐을 두고 돌아섰다. 건물 앞 솔숲 그늘이 가을 더위에 지친 나를 유혹했다.
나는 출입문 옆 방명록을 적는 탁자 곁으로 갔다. 그 곁에 음료수가 있었다. 나는 우선 음료수부터 한 컵 마시고 싶었다. 내가 음료수 한 컵을 따르고 있을 때다. 중년의 여인이 출입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가 탁자 위에 놓인 방명록에 반쯤 허리를 숙여 이름을 적고 있었다. 나는 무심히 그녀가 쓰고 있는 이름을 내려다봤다. 구, 옥, 순.
한순간 내 마음이 훅 달아올랐다.
이름을 다 쓰고 난 그녀가 싸인펜을 놓고 허리를 폈다.
-선생님이 구옥순 시인?
-아니 권영상 선생님?
그녀는 목에 건 내 이름표를 보았던 것이다.
맞았다. 우리는 오랜 구우처럼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며 긴 악수를 했다. 처음 보는 구옥순 시인이고, 그쪽에서도 처음 보는 권영상이었지만 그건 분명 재회였다. 그 순간, 아득한 과거의 기슭에서 조용히 밀려오는 앳된 기억이 살아올랐다.
우리에겐 30년 전인, 그러니까 1980년 그 무렵의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강원도의 어느 초등학교에 근무를 하고 있었고, 구옥순 시인은 부산의 어느 초등학교에 근무를 하고 있었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는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있었는데, 그 무렵 나는 가끔 ‘산호초’를 받아보았다. ‘산호초’는 부산 지역에서 동시를 쓰시는 분들이 엮어내는 동인지였다. 거기엔 김문홍, 김재원, 조명제 제씨들의 작품이 실려있었고, 특히 내 눈길을 끄는 딱 한 분이 있었는데, 그가 구옥순 시인이었다.
높다란
가지 끝에 매달린
도롱이
꿈으로 등불 밝힌다.
노을빛에
꽁지 물든
고추잠자리
나래 쉴 곳 찾다가
불빛처럼 새어 나오는
실 잣는 물레소리에
투명한
눈망울 굴리며
살풋 앉아 엿보니
고 속에 조그만 벌레 한 마리
무지갯빛
날개 다듬고 있구나
1980년쯤에 나온 동인지 <산호초>에 실린 구 시인의 ‘도롱이’이다.
그녀는 벌써 동시를 쓰면서 <산호초> 동인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막 당선(1979년) 되긴 했지만 아직 동시가 뭔지 모르던 시기였다. 그런 초년생인 내게도 행운처럼 <산호초>가 찾아왔고, 나는 그 속에서 구옥순 시인을 만났다. 구 시인의 동시 ‘도롱이’는 여느 시 못지 않게 빛났다. 조그마한 주머니나방애벌레가 제가 만든 도롱이에 들어가 나무 끝에서 꿈을 밝힌다는 이 시는 충분히 나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저녁이면 가끔 어두워가는 바다를 보고 돌아와 구옥순 시인에게 편지를 썼다. ‘도롱이’에 대하여, 청춘에 대하여, 그리고 동시에 대하여.
보낸 편지는 1주일 후면 답장이 되어 내게로 돌아왔다.
동동
봄꿈 안고
떠다닌 빗방울
흙알 하나하나
옴쏙옴쏙
매만지면
톡톡
튕겨 오르는
하얀 발길질
남은 한 오라기
꽃샘바람마저
부드러워지는 순간
-응아
삐죽이 움트는
연둣빛 아기 봄
1981년인가. 구 시인은 ‘부산 mbc 신인문예상’을 받으며 당당하게 등단했다. 그때 수상한 작품이 이 동시 ‘비’였다. 봄꿈을 안고 떠다닌 빗방울이 ‘연둣빛 아기 봄’으로 삐죽 움트는 그 순간을 노래했다. 동시 ‘도롱이’가 무지갯빛 날개를 키우는 노래라면, ‘비’는 새로운 희망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는 노래다.
나는 구시인에게 축하의 편지를 썼고, 구 시인은 부산의 하늘과 바다와 시와 즐겨 읽는다는 책에 관한 편지를 부쳐주었다. 그런 얼마 뒤, 웬일인지 우리의 편지 교류는 끝나고 말았다. 속절없이 편지를 보내보지만 답장은 아득히 돌아오지 않았다.
교육문화회관의 솔숲을 거닐면서 이제는 중년이 되어 돌아온 의젓하고 점잖아 보이는 구시인이 부산 특유의 억양으로 단절, 그 이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부산 mbc에 동시가 당선 되던 그해, 구 시인은 결혼했다.
“결혼 후 5년 동안, 나는 평생 겪어야할 일을 다 겪었어요.”
그녀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 5년 동안 구 시인은 아기 둘을 낳았다. 시부께서 병환으로 돌아가셨고, 무남독녀인 구 시인은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살림집에 병고에 빠진 친정어머니를 모셔왔다. 어머니마저 오랜 우환을 끝으로 세상을 뜨셨고, 홀로 남은 시어머니와 남편과 두 아이를 돌보며 직장을 다니느라 문학을 가까이할 여유가 없었다. 그 무렵 문학이란 구 시인에게 사치였다.
“아, 그랬었군요.”비명 아닌 비명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나 구 시인의 생각은 나와 달랐다. 그녀의 얼굴엔 험난한 바다를 온전히 건너온 항해자 같은, 인생의 고통을 능히 겪어낸 성자와 같은 달관의 빛이 어렸다. 30년만에 만났으면서도 우리는 마치 오래 알아온 사람처럼 편안해졌다.
오른손이 글씨 쓰면
왼손은 공책 잡아 주고
왼손이 바닥 닦으면
오른손은 재빨리 밀어 준다.
친구 잘하면
짝짝 손뼉 쳐 주고
기분 좋을 때
두 손 번쩍 만세도 부른다.
어려운 일 생기면
서로 껴안고 기도하고
긴 손톱 깎아 주며
단정하게 몸단장도 한다.
두 손처럼 속닥속닥
다투지 않고 사이좋다면
이 세상 아무 것도
부러울 게 없겠다.
구 시인의 동시 ‘오른손과 왼손’이다. 이 시는 카톨릭 잡지 <여기>에 실렸었고, 구 시인은 이 작품으로 2009년 부산여성문학 작가상을 받았다. 가정사로 말미암아 문학의 저 편에 있던 그녀가 28년만에 다시 등장하며 들고 나온 시가 이 ‘오른손과 왼손’이다. 긴 잠적을 뒤로 하고 그녀는 화려하게 나타났다.
잠적을 통해 그녀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분명한 것은 ‘두 손의 발견’이다. 결혼 이전까지의 그녀가 ‘한 손’이었다면 결혼 이후 그녀가 얻은 것은 ‘두 손’이다. 타인을 부축하고, 타인을 위해 기도하고, 안아주고, 박수를 보낼 수 있는 것도 두 손이 있어 가능하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 역시 이쪽과 저쪽을 두루 생각하는 ‘두 힘’에 의해 가능하다. 그녀는 그 동안 ‘도롱이’ 속에 갇혀 캄캄하게 살아온 것이 아니라 진정 빛나는 ‘두 개의 무지갯빛 날개’를 꿈꾸었던 것이다.
초기시 ‘도롱이’의 꿈은 비를 통해 ‘연둣빛 아기 봄’으로 태어났고, 다시 혼자만의 힘으로가 아닌 자식과 남편과 시모님과 이웃이라는 또 하나의 손을 통해 그 꿈이 완성됨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그렇게 28년의 강을 건너 중년의 시인으로 돌아왔다.
1. 동시집 <오른손과 왼손>
2010년, 구옥순 시인으로부터 한 권으로 동시집이 날아왔다.
청개구리 출판사에서 나온 <오른손과 왼손>이다. ‘부산여성문학 작가상’ 수상작 동시 ‘오른손과 왼손’을 표제시로 삼은 그녀의 첫 동시집이다.
오랜만에 내게로 돌아온 <오른손과 왼손>엔 구 시인의 30년 아닌 30여 년이 담겨있었다. 그러니까 그의 30년 전의 초기작 ‘도롱이’, ‘비’ 등과 근작이 마치 아퀴가 맞지 않는 시간의 흐름처럼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나는 이 동시집을 앞에 놓고 구옥순 시인의 <산호초> 시절 꿈이 또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를 생각하며 그의 시 속에 조용히 들어섰다.
흙 알갱이는
먼지만큼 작다.
그래도
흙과 흙이 손잡으면 운동장이 되고
흙과 흙이 포개고 뒹굴면 산이 되고
흙과 흙이 한 알도 빠짐없이 모여 지구가 된다.
흙 알갱이 한 알 한 알이
먼지만큼 작다고 얕볼 게 아니네.
나도 세계 친구들과 손잡고 지구 한 바퀴 돌아볼까?
동시 ‘흙이 모이면’이 먼저 내 눈에 들어왔다.
이 시가 꼭 좋아서가 아니라, 구 시인의 변모에 대한 내 궁금함의 대답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 시 1연에 나타나는 먼지 만큼 작은 ‘흙 알갱이’는 누굴까. 나는 그것이 구옥순 시인이라는 걸 이내 알아냈다. 흙으로 이루어진 운동장과 산과 지구 앞에 서 보면 안다. 흙알갱이 한 알이라는 존재가 몹시 보잘 것 없다는 것을. 그러나 이 작은 흙 알갱이도 서로 손잡으면 운동장이 되고 산이 되고 지구가 된다. 결혼과 동시에 ‘시댁’에 편입되면서 자신이라는 존재가 먼지 만큼 미약한 것에 불과함을 느꼈겠다. 그러나 그 미약한 것이 크고 훌륭한 것이 되기 위해선 가족 구성원들끼리 서로 화해하고 협동하고 마음을 맞출 때에야 가능하다는 것을 터득한 발로의 시가 이 시일 듯 하다.
아주 다행인 것은 구 시인이 먼지가 되어 영영 자신을 허공 속에 날려버린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그 먼지 속에서 작은 먼지들이 이루어내는, 엄마랑 단 둘이 살 때에는 모르던 또 다른 세상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작지만 만만치 않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다.
어느 날/ 나 모르게/ 꽃망울이 맺혔네.// 그 동안/ 네가 그렇게/ 힘들었을 줄 몰랐어.// 물 주고/ 바람 쐬고/ 햇볕 쬐었지만/ 네 몸에/ 빨간 열꽃들이/ 폭죽처럼 터지리라/ 상상도 못했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힘은 들었겠지만/ 너무 예뻐, 축하해.
‘몰라서 미안해’이다.
이 시 속에 나오는 ‘나’와 ‘너’는 두 인물인 듯 하지만 한 인물이다. ‘나’는 나로부터 조금 떨어져 있는 나이고, ‘너’는 도롱이 속 주머니나방애벌레가 아픔과 고통과 시련과 역경과 절망을 겪으며 살아온 실존의 ‘나’이다. 그 실존의 나는 꿈을 키우느라 열꽃이 폭죽처럼 터지는 수많은 밤과 낮을 참아왔고 기어이 꽃망울을 맺는다. 나는 그런 내가 너무나 대견스워 견딜 수 없다. ‘너무 예뻐, 축하해.’ 내가 내게 해줄 수 있는 찬사의 말치고 이 외에 또 더하여 무엇이 있겠는가.
2. 제 2 동시집 <꼬랑꼬랑 꼬랑내>
첫 동시집 <오른손과 왼손>이 나온지 4년만에 두 번 째 동시집 <꼬랑꼬랑 꼬랑내>가 나왔다. 동시집의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내가 읽은 시를 생각한다. 나는 분명 구 시인이 쓴 구 시인의 시를 읽었으면서도 구 시인이 품고 있는 구 시인의 내면의 길을 따라온 듯 하다.
동시집 <꼬랑꼬랑 꼬랑내>에는 시인이 갈등하는 세 갈래길이 어렴풋이 보인다.
첫 번째는 아픈 과거의 흔적을 빠르게 지우려 애쓰는 모습이다.
군인아저씨들
땡볕에
훈련 중이다.
커다란 키에
척척 줄을 맞추어
앞으로 잘도 간다.
덥다고 뒷주머니에
노란 물통
하나씩 차고 간다.
<꼬랑꼬랑 꼬랑내>에 실려있는 동시 ‘옥수수밭’이다.
시가 맑고 순수해졌다. 옥수수밭에 줄지어 서 있는 옥수수를 새로운 눈으로 본다. 줄맞추어 훈련하고 있는 군인들이라 본다. 척척 줄을 맞추어 앞으로 걸어간다고 본다. 옥수수대 옥수수통을 군인들이 뒷주머니에 찬 수통이라고 본다. 구 시인의 세상을 보는 눈이 맑아졌다. 재미있어졌다. 독자인 아이들 편에 바짝 다가가 있다. 오랫동안 그의 머릿속에 숨어있던 동심이 꼬물꼬물 기어나오고 있다.
이제 시인은 자신만의 경험을 통해 얻은 자신만의 세계관이나 신념 등으로 시를 만들어내는 일을 거부하는 듯 하다. 세상을 보는 눈이 이념에서 멀어져 있다. 그래서 시가 한결 가벼워졌다. 시적 대상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만큼 마음의 여유도 조금 생겨난 게 분명하다. 동시 ‘옥수수밭’은 어디로 봐도 흠잡을 데 없는 작품이다. 시에 생동감이 있고, 시 속에 숨 쉴 공간이 생겼고, 읽는 이조차 군인들 곁으로 달려가 괜히 ‘제자리에 섯!’ 해보고 싶어진다.
시인의 마음 상처에 새살이 돋아나는 듯 읽는 이의 마음조차 가볍고 홀가분하다.
“얘야, 미끄러질라
조심조심 걸어라.“
언 몸 녹이고
된장국 끓이며
마지막 온기
다 나누어 주고
잘게 부서져
하얀 재가 되어 누웠다.
눈이 와서
꽁꽁 언 자리에.
두 번째는 과거의 그늘에서 아직도 머뭇거리고 있다는 점이다.
위의 동시 ‘연탄재’는 그늘이라는 강을 건너온 전혀 다른 구옥순의 모습이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타인과 ‘상처받아 가면서도 서로 어우러지는 김장독 속 김치’ 같은 안아주는 시를 쓰고 싶었다고 했지만 상처가 시인의 살속에 녹아들기엔 시간이 좀 부족한 듯하다.
시인은 중년을 넘어섰다. 자녀를 출가시켰고, 남편은 퇴직하였고, 시인은 직장의 마지막 자리에까지 올랐다. 시인은 길고 긴 인생의 길에서 발견한 가장 완전한 것을 찾았다. 자신을 벗어던지는 헌신이다. 도롱이 속 주머니나방애벌레가 한 마리의 완전한 성체로 날아오르는 데엔 자신을 완전히 버리는 일이 필요하다. 자신을 버리지 않고는 주머니나방애벌레는 자유로워질 수 없다.
시 속의 연탄재는 이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 했다. 겨울 방안의 구들장을 데워주었고, 보글보글 된장국을 끓여 그 누군가의 따뜻한 저녁식사가 되어주었다. 이제 남은 것은 제 몸을 짓부수어 꽁꽁 언 길에 던지는 일이다. 훌륭한 주제의 시이지만 이 시가 동시로서 석연찮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구 시인이 아직도 자신이 쳐놓은 신념의 덫에서 벗어나기를 망설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세 번째는 떠나가신 모친에 대한 그리움이다.
젊은 사람 다 떠난/ 시골 같다.// 할머니 혼자/ 간간이 밖을 내다보며/ 아들 딸 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예쁜 핸드폰/ 귀에 대고 전화하거나/ 문자 날리는 학생들// 우두커니 바라보며/ 공중전화 혼자/ 빈집 지키고 있다.
‘공중전화박스’다. 왠지 확 눈시울을 붉어지게 하는 시다. 아무도 찾지 않는 빈 공중전화박스 속에 덩그러니 혼자 있는 전화기. 그는 누구인가. 모르기는 해도 자식들을 출가시킨 시인의 모습이거나 혈육 한 점 이 세상에 던져놓고 살다가 가신 시인 모친의 쓸쓸한 모습이 저렇지 않았을까.
구옥순 시인은 어쩌면 연탄재처럼 살아왔을지 모른다. 내가 구 시인에게 28년이란 잠적의 세월, 그때는 좀 슬펐을 것 같아요 라고, 그 옛날 서로 편지를 나누던 때처럼 이메일을 보냈다. 그러나 그때에 돌아온 대답은 의연했다.
인생공부가 산공부더군요. 지나놓고 보니 그때가 힘든 때였음은 분명하지만 그런 시기를 지나지 않았으면 어떻게 배추가 김치가 될 수 있었겠어요. 그랬다. 구 시인은 그 시기를 배추가 김장독에서 맛드는 시기라고 보았다.
나는 아! 하고 그의 인생이 이토록 올바른 길로 달려올 수 있었던, 그 보이지 않는 운명의 손길에 감사했다. 그에겐 그의 착하신 하나님이 있었다.
3. 제 3 동시집 <말의 온도>
동시집 <꼬랑꼬랑 꼬랑내>가 나온지 3년만에 제 3동시집 <말의 온도>가 같은 출판사인 ‘청개구리’에서 나왔다. 한번 출간이 어렵지 나오기 시작하면, 3.4년이란 시간도 어찌보면 길다. 28년 동안 항아리 속에서 깊고 깊게 숙성시킨 그의 시와 시에 대한 열망과 열정과 의욕이 서서히 힘을 내는 듯 하다.
<말의 온도>에 담겨있는 시들은 주로 자연을 노래한다. 흙은 아무리 힘들어도 꼭 잡은 나무의 손길을 절대로 놓치는 법이 없다거나 아무리 칡덩굴이 이웃 나무를 타고 오른다 해도 칡꽃을 미워할 수는 없다는 너그러운 미학을 시인은 자연을 통해 배운다.
움직이기 힘든
할머니 뒷바라지에 바쁜 엄마
여름철 장맛비에
내 마음도 질척질척
모처럼
햇살 좋은 날
“윤이야! 이불 널자.”
습기 날아간
보송보송한 이불에
할머니 얼굴은 웃음꽃
내 마음도 보송보송
<말을 온도>에 실린 동시 ‘장마 뒤의 햇살’이다. 이제 시인을 짓누르던 길고 긴 장마도 가고, 모처럼 쨍하니 햇빛이 났다. 그동안 몸은 질척거렸고 마음은 무거웠다. 모처럼의 이 햇빛 시간을 그냥 넘길 수 없다. 시인은 윤이를 불러내어 햇빛에 눅눅해진 이불을 넌다. 보송보송해지는 시인의 마음과 이불솜과 시의 분위기가 날아갈 듯 투명해지고 경쾌하다. 이제 보니 그게 행복이었다. 시인은, 삶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꾸 가벼워지는 이 행복에 웃음을 떠트린다. ‘도롱이’ 속 주머니나방애벌레가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르기 일보 직전이다.
식탁보 하다 남은 녀석
머릿수건 하려다 못한 녀석
앞치마 신청했다가 떨어진 녀석
가방 만들다 남은 자투리 녀석
슈퍼맨 망토 하다 미끄러진 녀석
모두 모여라. 기죽지 말고
우리끼리 손 내밀고
다 같이
야, 파이팅!
같은 동시집에 실린 동시 ‘조각보’다.
나도 모르게 덩달아 손을 얹고 ‘야, 파이팅!’ 외치고 싶어진다. 파이팅을 외치는 그들이 누구인가. 버림받을 위기에 놓인 조각 헝겊들이다. 시인은 그 조각들을 모두 불러내어 공그르고 홈질하고 시치고 박음질해 완전한 조각보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마치 기죽어 사는 이들을 이리 데굴 저리 데굴 굴리고 어르고 달래어 기를 살려내는 일 같아 나도 행복하다. 어른도 좋아할 테지만 독자인 어린이들 역시 환호할 시다.
이런 행복은 어디서 왔을까. 작은 헝겊 쪼가리들이 자신의 모자람을 받아들인 뒤 서로 마음을 맞추어 더 큰 보자기를 만들어낼 때 가능하다. 이것이야말로 구 시인의 시가 일관되게 말하는 ‘어우러 안는’ 관용과 이해와 포용의 메시지며 도롱이 속 주머니나방애벌레의 비상법이기도 하다. 야, 파이팅이다! 나도 그들 손등에 손을 얹고 그들과 함께 외쳐보고 싶다.
드디어 내게 주어진 원고가 다 찼다. 구옥순 시인의 동시나무에서 이제 내려올 때가 됐다.
부디 건강하시길 바라며, 세상을 따뜻이 감싸주는 당신의 시가 우리들 기억에 오래오래 남기를 기원한다.
<열린아동문학> 2019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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