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비평

시대를 고민하는 시의 아픔과 아름다움

권영상 2019. 2. 12. 18:20

시대를 고민하는 시의 아픔과 아름다움

권영상




지금이 우리나라 동시문학의 전성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적어도 전성기가 되려면 다양성이 꽃피어야 합니다. 시인들의 다양한 시적 모험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10 여개의 동시 발표지면에 비하면 시 창작 인구가 턱없이 부족하고, 시 창작 욕구나 동력이 약하다 보니 발표 시의 질이 저하될까 은근히 걱정됩니다.



이야기를 더 진행시키기 전에 먼저 드려야할 내용이 있네요. 2019년부터 분기별 동시 계평 분량이 200자 원고지 30매에서 20매로 줄었습니다. 그런 관계로 당연히 다루어볼만한 인용시도 적어질 게 뻔합니다. 주제도 동시 진단과 동시 방향 제시로 제한되어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동시의 방향 제시는 다수의 동일 주제의식을 가진, 비교적 어린이 독자의 삶과 시대를 고민하는 시들을 가려 함께 생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동시의 질 저하가 우려되는 국면에서 꼭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서정시를 다루는 문제점과 시 정신입니다.

서정시는 아시다시피 창작자의 정서가 크게 개입하는 시지요. 그런 관계로 자칫하면 주관적 감정에 함몰하기 쉽습니다. 그런 시는 시인에게는 위대할지 몰라도 그 시를 읽는 독자를 고통에 빠지게 할 우려가 높지요. 다시 말해 지극히 사적인 감정에 빠진 서정시는 공유가 힘들지요. 일반 성인시가 점점 독자를 잃어가는 이유가 그 탓입니다.



그런 류의 시들은 대개 자기 세계에 갇혀 있어 동시대인들의 아픔을 나 몰라라 하거나 세상사에 귀를 막거나 하지요. 그들은 자신만의 이데아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바깥세상과는 동떨어진 세계를 즐기지요. 그런 시에는 대개 갈등이 없고, 고뇌와 아픔이 없고, 있다면 견고한 자기만의 유희와 쾌락이 있을 뿐입니다.



특히 동시는, 독자와 먼 거리에 놓여있는 자연을 노래하기보다 그들과 함께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여야 하겠지요. 다행히 우리 동시에는 분단이나 실직, 빈곤, 환경 등의 현실이 깊숙하게 들어와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가 잘 읽히지 않는 것은 시가 전하려는 의미가 약하거나 행간에 의미를 담으려는 진중함보다 자기감정이나 생각을 진술하는데 그치거나 통념적 범주를 뛰어넘으려는 시정신이 허약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시인은 소재의 외연을 넓혀가는 일에 복무해야 하지만, 기존의 우리의 정신계를 지배해온 관념을 해체하거나 뒤집거나 벗어던지려는 고뇌 또한 필요합니다. 시 읽는 맛은 그럴 때에 생겨나는 거지요. 독자가 굳이 시를 읽으려 하는 이유는 시인의 새롭고 신선한 눈을 통해 세상을 다시 만나고 싶기 때문일 테니까요.



고욤나무 열매는 떨어지지도 않지// 천둥의 밤/ 번개의 밤/ 늦가을 찬 서리가 세 번 내려도// 어미가 새끼를 놓아주지 않듯/ 새끼가 어미에게 매달리듯// 그렇게 꼭 붙어 있지.

                               

                                                                                         -김류의 ‘아픔’ 전문 <어린이와 문학> 2018년 12월호


하루살이가/ 2교시 끝나자마자/ 조퇴했다.// 한평생/ 학교만 다닐 수는 없다며// 쉬는 시간에 모은/ 딱지를 팔아 길을 떠났다.

                               

                                                                                         -고지운의 ‘여행’ 전문 <어린이와 문학> 2019년 1월호




앞의 김류의 ‘아픔’이나 뒤의 고지운의 ‘여행’이나 서로 다른 이야기인 듯해도 들여다보면 또 그렇지 않습니다. 김류는 고욤나무와 고욤이 새 봄이 올 때까지 떨어지지 못하는 작태를 반어적으로 꼬집고, 고지운은 꽉 막힌 학교를 버리고 과감하게 하루살이를 떠나보낸다는 점에서 현실을 직시하는 궁극적 태도가 같습니다.



김류의 ‘아픔’은 고욤나무와 고욤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꼭 그 둘의 이야기는 아니지요. 이들은 천둥이 울고 번개가 치고 찬 서리가 내리는, 결단을 내리기에 충분한 결별의 기회가 와도 독립하지 못하고 붙어사는, 사람살이의 은유로 받아들인다면 사정은 심각해집니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눈물겨워지고, 목메어지는 거지요. 그것은 부모라는 따뜻한 울타리를 떠나가지 못하는 오늘의 나약한 자식들의 행태를 보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세 집 건너 한 집씩, 성년이 되어도 경제적으로 독립하기를 포기하거나 결혼마저 포기한 채 부모 품에 기대어 살기를 바라는 것이 외면할 수 없는 우리 현실입니다. 이 시는 분명 시대와 함께 호흡하고, 가슴 아파하고, 고뇌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 가슴에 찡하게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이 시의 ‘천둥의 밤/ 번개의 밤/ 늦가을 찬 서리가 세 번 내려도’가 만들어내는 운율과 그 행간에서 작용하는 의미들이 이 시를 크게 긴장시키고 있네요.



고지운의 ‘여행’은 한평생 학교만 다닐 수 없다며 쉬는 시간에 모은 딱지를 팔아 공부가 끝나기 전 하루살이가 길을 떠난다는 내용이네요. 앞의 시와 마찬가지로 우화시네요. 우화의 본질은 동식물을 동원해 인간 삶의 모순과 행태를 꼬집는 거지요. 여기서 그 모순이란 뭘까요? 한평생 학교만 다니며 공부한다는 일입니다. 한평생 학교 공부를 하는 그 공부가 인격을 갈고 닦는 일이 아닌 한 그건 인생을 낭비하는 일입니다. 교육과잉 현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네요. 하루살이가 단호히 학교를 떠나는 데엔 그런 모순이 있습니다.



대개의 동시들은 학교를 떠나지 못하지요. 어떻든지 학교를 그만 두겠다는 결단을 잠시만의 실수로 후회하거나 자책하거나 타협하거나 어떤 묘수를 꺼내서든 주저앉히고 말지요. 그것은 스스로 통념의 벽을 깨뜨리고 나설 의지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고지운의 하루살이는 분연히 학교를 떠난다는 점에서 그의 결단은 독자를 속 시원하고 후련하게 만듭니다.



도토리거위벌레는/ 잎 달린 가지 끝/ 살 오른 도토리를 골라/ 구멍을 뚫고/ 알을 낳고/ 입구를 막고는/ 가지를 마저 자른다./ 도토리와 흙이/ 이제부턴 네 엄마야/ 곧 올 가을 겨울/ 잘 살아라/ 잘 살아라/ 이르고 이르며/ 잎을 날개 삼아/ 땅으로 살풋/ 알을 떠나보낸다.

                

                                                         -백우선의 ‘도토리나무야 미안해’ 전문 <어린이와 문학> 2018년 12월호




백우선의 ‘도토리나무야 미안해’는 왜 떠나야하는지 이별의 아픔과 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별, 이별 하니 이별인 줄 알겠지만 실은 생존을 위한 아픈 독립이지요. 어미인 도토리거위벌레는 도토리나무에 매달린 살 오른 도토리에 구멍을 뚫고, 알을 낳고, 입구를 막고, 그리고 ‘땅으로 살풋/ 알을 떠내보’냅니다. 말이 ‘살풋’이지 알을 떠나보내는 어미의 마음엔 세상을 울릴 만큼의 쿵! 하는 고통의 물결이 치는 거겠지요.



그런 결별의 아픔을 감수하고서도 땅으로 떨어뜨리는 이유는 도토리 속에 낳아놓은 자식(알) 때문입니다. 부모 슬하를 멀리 멀리 떠나가야 사는 게 도토리거위벌레의 새끼이고, 사람의 아들입니다. 거위벌레가 자신이 낳은 알과 결별할 때 그는 이렇게 말하지요. 이제 나는 네 어미가 아니다. “도토리와 흙이/이제부턴 네 엄마야” 더 이상 자식에게 매달리지 않고, 자식의 생을 오로지 자연에 맡기고 돌아섭니다. 그리고 도토리나무 가지를 자르네요. 시의 배후에 눈물이 가득 고이는 걸 차마 외면할 수 없습니다.



세 편 모두 고욤나무와 하루살이, 도토리거위벌레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모두 우리의 아픈 현실과 너무나 맞닿아 있는 우리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쉽게 공감이 가네요. 그리고 거기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닌, 새롭게 출발하는 시들이라는 점에서 마음이 끌리네요. 우리 동시가 가야하는 방향, 비록 잘 완성된 시들은 아니지만 이 시들에서 그 방향을 짐작해 보고 싶었습니다.

(아동문학평론 2019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