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깨우는 북방의 밤
권영상
석유 한 병을 샀다. 방안 책장에 넣어둔 램프가 생각나서다. 그걸 그에게서 선물 받은 게 아마 십여 년은 좋이 될 성싶다. 그 때만 해도 그는 나의 절친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오래 흐른 지금 그와는 교류도 끊기고 그의 종적도 알 리 없다. 그러니 램프 역시 책장 어두운 곳에서 빛을 잃은 지 역시 오래다.
그때 그를 처음 만난 곳은 투루판 어느 왕조의 폐허가 된 도읍에서였다. 알맞게 턱수염이 난 그는 분명 처음인데도 마치 구면 같았다. 우리는 서로 그런 식으로 어디서 본 듯한 사내인데 하며 지나쳤다. 분명 그와 나를 데리고 다니는 여행사는 서로 달랐다. 그런데도 우리는 둔황에서 그리 멀지 않은 숙소에서 우연찮게 또 만났다.
“술이나 한잔 하러 나갑시다!”
그도 나를 보고 그 말을 했고, 나도 동시에 그에게 그 말을 했다.
초면이라 해도 술 한 잔쯤 너끈히 응해줄 사람 같았고, 마음을 털어놓고 형님 아우하고도 남을 사람 같았다. 우리는 구우를 만난 것처럼 어두운 밤 시장 통으로 걸어 나갔다. 별이 많은 밤이었다. 별도 별도 그렇게 많은 별은 처음이었고, 커도 커도 그렇게 큰 별을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마치 과수원의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크고 향기로운 가을 사과처럼 별은 머리 위까지 내려와 있었다. 우리는 북방을 떠도는 오래된 나그네나 되는 것처럼 이국의 거리를 전전하며 술을 마셨다.
그 이튿날, 명사산의 사막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그는 낙타를 타고 내 곁으로 왔다. 나는 그의 낙타 고삐를 잡고 짧기는 하지만 아쉬운, 고운 모래사막의 여정을 그와 함께 걸었다. 사람이 살면서 이런 곳에 와 이렇게 스치듯이 만나는 인연도 있구나 싶었다.
“나중에 또 봅시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실크로드 7일 동안 우리는 세 번의 우연한 만남을 겪었다. 나중에 보자고 악수를 하고 헤어졌지만 기약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에겐 왠지 어디서 또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느낌이 있었다.
우리는 결국 인사동에서 다시 만났다. 그는 아쟁을 켜는 소리쟁이었다. 막 공연을 끝마치고 술 한 잔씩을 걸치러 인사동에 들렀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 반겼고, 둔황의 별을 얘기했고, 그는 내게 고단하게 살아가는 한 여인의 ‘인생’을 아쟁으로 들려주었다. 그때 우리는 헤어지며 서로에게 선물 하나씩을 했다. 그게 바로 상감을 한 이 램프다.
“힘들 때면 둔황의 별을 생각합시다.”
생각의 우물이 말라갈 때, 일에 대한 욕망을 잃어갈 때 이 램프의 불을 켜자는 말을 서로에게 했다. 글이라는 게 샘물과 같아 퍼 올린다고 마냥 솟아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누구나 그런 경험이 다 있겠지만 생각의 끝이 말라간다 싶을 때면 두려움을 느낀다. 이러다 영영 글을 그만 두는 게 아닌가 하는. 그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겠다. 똑 같은 연주라도 마음의 흥이 일어나지 않는 연주는 죽은 연주나 다름없다. 그도 공연을 하며 그런 무서운 경험을 했을 거다.
우리의 인연은 그 후로 몇 차례 더 만나고 끝나버렸다.
나는 오랫동안 꺼져 있던 램프를 찾아들었다. 가득 석유를 채우고 내안의 불을 켜듯 불을 붙였다. ‘인생’을 바람 휘몰아치듯 켜며 이마에 땀을 쏟던 그의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넘실거리는 불빛 속 그를 들여다보며 북방의 밤을 다시 생각한다. 고갈 된 듯한 내 안의 샘이 다시 치오르기를.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락방에서 하룻밤을 (0) | 2019.01.01 |
---|---|
새해에는 더욱 행복하시길 (0) | 2018.12.31 |
성탄이 가까워오는 밤 (0) | 2018.12.23 |
묻어둘 건 묻어두고 가자 (0) | 2018.12.21 |
그때는 그때의 것 지금은 지금의 것 (0) | 2018.1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