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그때는 그때의 것 지금은 지금의 것

권영상 2018. 12. 10. 20:43

그때는 그때의 것 지금은 지금의 것

권영상


 


토요일 오후, 충무로행 전철을 타고갈 때다.

어디쯤 왔어? 버티고개역 막 떠났다고?”

옆자리에 앉은 20대 여자의 휴대전화 통화가 귀에 들어왔다. “3호선은 사람들 꽤 많어. 방금 한강을 보았다고? 배는? 유람선 말이야. 유람선 방향으로 자전거 행렬이 가고 있다고? 그 전철 안내방송 나온다. 다음이 옥수역이지? 우리, 3호선 알지?”

서로 만나기 위해 이쪽에서 가고 있고 또 그쪽에서 오고 있는 모양이다.



계단을 오르고 있다고?”

옥수역에서 내린 누군가가 3호선 환승을 위해 계단을 오르는 모양이다. “거기 다 오름 3호선 통로 나와. 참 너 내게 줄 꽃 가져오고 있어? 우리 만난 지 100일이잖아. 준비했다고? 오호, 멋져. 이런 날 꽃도 못 받으면 무슨 창피냐? 선물은? 알았어. 안 물어볼게. 3호선 타는 홈에 왔다고? 반대편에 가 서지 말고. 어느 역에서 내려야하는지 알지?”

이제야 알겠다. 통화 속 그 누군가는 남자다. 그는 지금 내 곁에 앉아 통화하는 여자를 만나러 오고 있는 중이다. 요즘 젊은 연인들은 만남도 아쌀하고 재밌다. 서로를 향한 11초의 움직임까지 다 공유하고 싶어하는 솔직함이 있다.



신사역을 지나면서 그녀가 일어섰다. “지금 표내는 게이트를 들어서고 있다고? 난 네게 가려고 방금 일어섰어. 전철이 서고 문이 열리면 네게로 슝!”

나는 눈을 감았다. 내 곁 빈 자리에 또 누군가가 앉고 있다.

예전엔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그녀를 기다렸다. 남자가 먼저 약속장소에 나가 여자를 기다렸다. 그때는 그게 매너였다. 약속시간이 가까워지면 가슴이 뛰었다. 집에 전화가 없는 우리는 약속을 주로 편지로 했다. 한달 전에, 아니면 열흘 전에.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도 못하는 그런 막막한 열흘 또는 한 달 뒤의 어느 날과 어느 시간.



다방의 시계가 약속 시각에 가 닿으면 눈이 출입문을 향한다. 이제 10분이나 15분쯤 지나면 그녀는 온다. 그녀는 정해진 시각에 딱 맞추어 나오지 않는다. 그게 그때 그녀들의 매너였고, 이해가 안 되겠지만 그게 매력이었다.

남자는 그 동안 별의별 생각을 다 한다. 그녀의 마음이 변한 건 아닌지. 눈치빠른 오빠가 지금 그녀의 신발을 감추어놓고 사라진 건 아닌지. 시간이 무작정 흘러간다 해도 연락할 길이 없다. 그녀의 집에 전화기가 있다 해도 엄두를 못 낸다.



그 무렵의 전화는 거실 탁자 위에, 그것도 보물단지처럼 예쁜 헝겊 밑받침을 깔고 앉아 있다. 전화벨이 울리면 온 식구의 귀와 시선이 모이는 곳. 거기다 들이대고 전화를 건다는 건 자살했위다.

그녀를 기다리느라 시켜둔 커피는 다 식고, 애꿎은 엽차만 마신다. 그때다. 애태우고 애태우던 긴 기다림 끝으로 다방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선다. 나는 반가움의 감정을 억누르고 손을 들어보인다. 그녀는 그렇게 좀 늦어서 더 예뻐지곤 했다.



지금 젊은 연인들에게 그때 그 기다림의 사랑을 느껴보라 한다면 받아들일까. 턱없는 일이다. 그때는 그때의 것. 그리고 지금은 지금의 사랑법이 있다. 튼튼한 자물쇠에 김하늘 오영규 골인할 거다쓰고 남산 타워 펜스에 꽉 잠근다. 그리고 그 아래 벼랑에 열쇠를 던져버리면 된다. 그 이후의 일은 그 이후의 일. 지금 행복하면 더 바랄 게 없다.

봉봉다방에 두고온 설레임은 봉봉다방의 것. 지금은 지금의 것. 사랑의 밀도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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