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성탄이 가까워오는 밤

권영상 2018. 12. 23. 18:48

성탄이 가까워오는 밤

권영상




전철에서 내렸다. 늦은 모임을 끝내고 돌아오는 자정이 임박한 시각. 이제 잠시의 시간이 흐르면 성탄의 밤이다. 전철역사의 이슥한 불빛마저 희미하다. 천천히 출구로 향하는 계단을 오른다. 이 역은 유독 계단이 많으면서도 에스칼레이터가 없다. 계단의 중간쯤에서 문득 메모할 거리가 떠올랐다. 휴대폰을 꺼내 벽쪽에 기대어 휴대폰 메모지에 메모를 하고있는 중이었다. 아래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누군가가 내 엉덩이를 툭 쳤다.



“아, 미안합니다.”

나는 그 말부터 했다. 나를 비켜 올라가는 검정옷을 얼핏 보며 메모를 마치고 다시 계단을 올랐다. 내 엉덩이를 툭 친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에게 불평했다.

“좀 비켜 가주지.”

나는 그랬다.



바깥 기온은 이미 새벽으로 갈 듯 싸늘하고, 냉기가 이마를 감싼다. 옷깃을 여미고, 목을 움츠리고, 마스크를 했다. 그때다. 저쯤 앞에서 똑똑똑 길가는 소리가 난다.

‘아, 그 사람이었구나!’

순간 나는 계단에서 내 엉덩이를 밀친 그 사람을 떠올렸다. 사람이라곤 없는 이 깊은 밤. 길에는 똑똑똑 밤길을 두드리며 가는 그이와 나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그이가 분명했다. 그이는 내가 멈추어 메모를 하고 있는 걸 보지 못했다. 그 까닭에 철제 손잡이에 의지해 올라오다가 내 엉덩이를 친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좀 비켜 가주지!’라고 한 나만 생각하는 내가 미웠다.



깊은 밤, 나는 그이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이는 가느다란 지팡이로 이슥한 밤을 똑똑똑 두드리며 이면도로로 들어가는 차도를 건너고, 영업을 마치고 길에 내놓은 음식점 쓰레기 봉투를 비키고, 길가에 불쑥 세워놓은 배달 오토바이들을 비키며 걸었다.

결국 나는 몇 번이나 기침을 하며 그이를 앞질렀다. 컴컴한 커피가게를 꺾어 돌아 골목길로 접어들 때다. 예의 그 똑똑똑 소리도 나를 따라 골목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가시는 길이 같은 모양이네요.”

나는 그이가 놀랄까봐 몇 번의 기침 끝에 물었다. 친구를 찾아간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그이가 찾아가는 친구네는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였다. 이 밤에 같은 길을 같이 걸어오다니! 반가웠다. 추운 밤이 갑자기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앞서 걸으며 그이와 함께 아파트 뒷문으로 들어섰다. 나는 5번열, 그이가 찾아간다는 친구가 사는 집은 2번열.

“아, 저기 5층, 저 집이군요.”

아파트 마당에서도 나는 대뜸 그이가 찾아가고 있다는 집을 알 수 있었다. 베란다에 세워놓은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와 붉은 별사탕 불빛이 켜져 있는 집.



그이는 그쯤에서 멈추더니 전화를 걸었다.

누군가 전화를 받는지 그 집 트리의 멈추어 있던 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불빛이 반짝이는군요.”

통화를 마친 그이가 대답했다.

“그 불빛을 보고 찾아올 사람이 또 있거든요.”

아마 저 트리를 바라볼 수 있는 거리에 그이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쯤에서 나는 돌아섰다.

집에 들어오니 11시 50분. 성탄이 가까워오는 시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