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날 동화 두 편
권영상
“얘야!”
아침 식사를 마친 아버지가 나를 부른다.
“오늘 이모할머니댁에 갔다오너라.”
일요일, 아버지가 이란 이모할머니댁 이야기를 꺼내신다. 우산을 놓고 오셨다는 거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가로저을 뻔 했다. 집에서 이모할머니댁까지 가려면 버스를 타고, 다시 기차로 갈아타야 하는 먼 길이다.
“네. 아버지.”
나는 마음을 바꾸었다. 다녀온 적이 있었고, 무엇보다 나는 여덟 살이다. 나이가 어리긴 하지만 아버지는 늘 내가 남자답고 용기 있게 자라기를 바란다.
일요일 기차 안은 한산하다. 나는 의자에 무릎을 꿇고 올라앉아 창밖 풍경을 싫도록 본다. 엄마가 옆에 있었다면 그만 책이라도 읽으라고 했겠지만 옆에는 엄마가 없다.
감자 한 통을 팔고 돌아오는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기차가 터널 속으로 들어가자 창문에 어리는 자신의 얼굴을 만나고,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눈앞에 펼쳐지는 바다와 섬과 바다새들을 싫도록 바라본다.
그리고 이란역에 내린 후, 나는 오래전 기억을 떠올리며 이모할머니댁을 찾아간다. 거기서 아버지가 두고 온 우산과 이모할머니가 주신 풋마늘 다섯 근을 메고 혼자 집으로 돌아온다.
타이완의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인 우 니엔찐의 동화 ‘여덟 살, 혼자 떠나는 여행’이다.
나는 고개를 들고, 나무 벤치 등의자에 허리를 쭉 편다.
가끔 벚나무길을 따라 여기 이 어린이놀이터에 오곤 한다. 놀이터 한 귀퉁이에 조그마한 이동문고가 있다. 쉰여 권은 될까. 어린이 놀이터니까 주로 그림책이거나 동화들이다.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오후의 가을 햇살이 내 등을 따스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공부를 쉬는 일요일이라 아이들이 꽤 여럿 나와 논다.
그네를 타고, 시소를 타고, 엄마가 지켜보는 앞에서 세 발자전거를 타고......
저 아이들도 이다음에 ‘여덟 살 아이’가 되겠다. 저 아이 아빠들도 동화 속 아버지처럼 아이들을 용기 있는 자식으로 키우고 싶겠다.
학교 뒷산에 성자가 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근데 그 산으로 소풍을 간다는 말을 듣고 나는 너무나 설렌다. 혹시 그분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소풍 가는 날, 선생님보다 먼저 산으로 올라간 아이들은 성자가 사는 오두막집을 발견한다. 그러나 성자는 거기에 없다. 어쩌면 이 소란을 피해 잠깐 숲에 들어갔을 거라 생각한 나는 홀로 숲길을 찾아들지만 길을 잃는다. 길을 찾아 헤매느라 목말랐던 나는 샘물을 만나고, 엎드려 맑은 샘물을 들이마신다. 갑자기 몸이 파랗게 살아오르는 듯 행복해진다.
나는 산길을 내려오며 생각한다.
‘내가 지금 행복한 건 성자가 샘물을 타고 내 몸에 들어왔기 때문인지 몰라.’
그렇게 마음 속 깊은 곳에 성자를 받아들인 나는 그때의 그 행복을 기억하며 어른이 된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행복하다.
이해인 수녀님이 옮기신 틱 낫한 스님의 ‘마음속의 샘물’이라는 동화다.
저 아이들을 지켜보는 엄마들 마음도 그렇겠다. 동화 속의 ‘나’처럼 자식들이 동심을 간직하며 자라고, 어렸을 적에 만난 행복을 오래오래 키워가길 바라겠다.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의 가을 (0) | 2018.10.26 |
---|---|
슬픈 눈물 (0) | 2018.10.17 |
수세미꽃집 고추밭 (0) | 2018.10.03 |
한가위 추석 잘 쇠십시오 (0) | 2018.09.22 |
고지박국 속에 뜨는 얼굴 (0) | 2018.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