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고지박국 속에 뜨는 얼굴

권영상 2018. 9. 21. 21:27

고지박국 속에 뜨는 얼굴

권영상




일을 마치고 버스길 대신 골목길로 들어섰다. 이 길을 계속 타고 내려가면 서울극단이 나오고, 그 끝에 서울역이 있다. 담장이 나트막한 집들이 사라질 즈음 제법 널찍한 길이 나왔다. 다리도 쉴 겸 멈추어 서서 저쯤 파란 대문 집을 본다.

길가 전신주에서 그 집 처마로 들어간 전깃줄에 고지박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서울역 가까운 골목길에서 만나는 이 뜻밖의 고지박 풍경이라니! 그걸 바라보며 서 있으려니 시골 어느 길모퉁이에 와 서 있는 느낌이다. 푸근하고, 편안하고 정겨운 풍경. 고지박 줄을 올린 저 파란대문 집 주인의 손길 탓에 갑자기 낯선 이 골목길이 낯익은 풍경처럼 훅 변한다. 이 별것 아닌 것 같은 별것 때문에 왠지 이 마을이 고향 같고, 여기 살고 있는 분들조차 낯익은 분들 같고, 그들 모두 순박할 것 같다.



그때다. 지나가시던 할머니 한 분이 내 옆에 와 서며 허리를 펴신다.

“저걸 볼 때마다 고지박국 생각이 난다우.”

할머니는 마치 오래 전부터 나를 알아온 사람처럼 다정하게 말을 거신다.

“박속을 파내고, 나박나박 썬 박에다 소고기 넣어 박국 끓이면…….”

할머니가, 하시던 말씀을 멈추고 나를 올려다보신다. 파머넌트 머리에 고향의 어머니같이 편안한 분이다. 내가 할머니 말씀을 듣고 있는지, 그걸 알아보시는 듯 했다.



“아, 예. 고지박국. 나박나박, 소고기 고지박국 좋지요. 간간한.”

나는 듬성듬성 할머니가 하신 말씀을 이어가다가 국간장을 떠올렸다. 왠지 내 입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고지박국의 은은한 간장 맛.

예전, 어머니가 해 주시던 박향이 도는 고지박국도 맛이 간간했다.

아들집에 온지 사흘이 됐다는 할머니가 저쪽 내가 걸어 내려온 골목길을 가리키신다. 그쯤에 아들집이 있다고 했다. 길을 잃을까봐 근방에서 아들 내외가 돌아올 때까지 하루 종일 기다리고 있다 하셨다. 박줄을 쳐다보는 내게서 어쩌면 고향 분을 떠올리셨는지 모르겠다.

그분과 헤어져 서울역을 향해 걸어오면서도 나는 내내 고향의 어머니 같은 그분과 그분이 말하시던 고지박국을 생각했다.



집에 돌아오니 뜻밖에도 아내가 저녁밥상에 고지박국을 내놓았다.

“웬 고지박국!”

그제야 아내는 작은형수님이 보내오셨다는 택배 상자를 열어보였다. 그 안에 햅쌀 조금, 햇고구마 조금, 개복숭아 효소 한 병, 아직도 한 덩이 더 남아있는 연두색 고지박.

어머니 떠나가신 뒤부터 고향에 계신 작은형수님은 철마다 제철음식들을 보내오신다. 여든 연세임에도 단 한 철도 거르지 않으신다.



“이 일이 좋아서 하는 거니 제발 제 행복을 빼앗지 말아줘요.”

전화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면 작은형수님은 한사코 내 말을 막으신다.

고지박국 한 숟갈을 떠 입에 넣는다. 간장맛과 어우러진 박향이 입안에 은은히 돈다. 고향의 가을 맛이다. 새하얀 박속처럼 입이 맑아진다. 이럴 때엔 작은형수님이 계셔서 좋다.

이제는 작은형수님도 그 옛날 어머니 얼굴처럼 이마에 주름이 굵다. 편찮으신 어깨는 조금 나아지셨는지. 작은형수님 얼굴이 박국 속에 은은히 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