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수세미꽃집 고추밭

권영상 2018. 10. 3. 17:52

수세미꽃집 고추밭

권영상

    

 


길 건너편에 수세미꽃집이 있다. 담장을 기는 수세미 덩굴이 그 댁 대문을 송두리째 뒤덮었다. 여름부터 노랗게 피던 수세미 꽃은 지금도 그렇다. 가끔 그 수세미꽃집 할머니가 수세미꽃 대문을 비긋이 열고 나와 죽은 듯이 고요한 고추밭에게 말한다.

점심요!”

그러면 고추밭이 알겠어요!” 한다. 고추밭과 소통이 되는 걸 알면 할머니는 얼른요!” 하고 돌아선다. 고추밭도 그런 사정을 알겠지.!” 한다. 그제서야 할머니는 수세미꽃 가득 핀 대문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고추밭은 크다. 800 여 평은 되지 싶다. 할머니 아드님이 고추밭에 들어서서 약을 칠 때에 보면 모자만 조금 보일락 말락  고추들 키가 크다.

건너편 산에서 꿩이 꿩꿔거겅! 박장대소로 웃어젖힐 때가 있다.그럴 때면 우리들은 간이 떨어져 콩알만 해지는 걸 느낀다. 산자락 아래 놓여있는 수세미꽃집 고추밭도 그렇다. 그 웃음소리에 놀라 껑충 날아올랐다가 털썩 주저앉는다. 물론 고추밭 고추들도 놀랄 수밖에.



고추밭이 정신을 깜물 놓쳤는지 뜸금없이 노래를 불러댄다.

, , ,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에 나이가 있나요. 마음은 하나요, 느낌도 하나요.’

불쑥 불러대는 이 미치광이 노래에 나도 하던 일을 놓고 고추밭을 건너다본다. 접촉 불량 오디오에 전원이 들어온 것처럼 고추밭이 마구 노래를 부른다. 들썩들썩 춤을 춘다. 더운 여름 한낮이 불끈거리며 일어서려 한다. 칸나가 꽃대를 세운다. 배추 모종을 하던 사람들 엉덩이가 들썩들썩 한다.



그러고 9월쯤인가. 어느 더운 날 파라솔 한 대가 고추밭 이랑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어디 대천 금천 해수욕장에 보란 듯 태양을 가리고 서 있던 그 파라솔이다. 사람 없는 고추밭에서 저 혼자 이쪽 밭머리에서 저쪽 밭머리로 파라솔이 이동하고 있을 때다.

여보세요? 여기 짜 두 개하고, 오시다가 막 하나 사다 주세요.”

고추밭이 어디다 전화를 건다. 짜 하나하고 막 하나를 부탁한다. 파라솔이 고추밭이랑 밭머리쯤에서 멈출 때다. 짜 두 개가 달려온 모양이다. 고추밭이 탈탈탈 한다. 이윽고 향기로운 짜 냄새가 솔솔 풍겨온다. 그 짜가 다시 수세미꽃집 대문 안으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간다. 나올 때에 보니 어깨와 머리 사이에 수세미 한 통을 끼고 있다. 시동을 건다. 이동식 오디오가 , , , 내 나이가 어때서를 열창하며 시골길 먼지를 풍기며 급히 사라진다.



근데 요 며칠 전이다.

술 한 잔 자시고 해요!”

오랜만에 수세미꽃집 할머니가 고추밭을 향해 소리친다할아버지 한 분이 고추밭에서 나온다. 그댁 아드님이 병을 얻어 입원 중이라 한다. 낯선 이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오래 헤어져 살던 분이라 했다. 요 얼마 사이, 고추밭에서 그런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오늘 안성에 내려와 보니 그 좋던 고추밭 고추가 다 시들었다. 푸른 빛 하나 없이 온통 누렇다. 아드님 손길을 못 받다보니 고추밭도 살맛을 잃은 모양이다. 내 나이가 어떠냐며 노래하던 고추밭이 참 안 됐다. 수세미집 수세미 꽃은 가을이 갈 때까지 피고 지고 피고 지고할 기세다.

수세미집 아드님이 얼른 퇴원하여 내년에도 씩씩한 고추밭을 보여주었으면 싶다. 어느 추운 날 고깃국을 끓여 고추밭에 날라드리던 나의 기억이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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