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소원 들여다보기
권영상
지난겨울, 직장에서 물러난 아내가 뜻밖에 동백꽃 타령을 했다. 동백꽃을 보면 그간의 고됨을 다 잊을 수 있다는 듯 내게 매달렸다. 마침 남도에 사는 친구로부터 동백꽃이 절정이라는 소식이 있었다. 우리는 힘겹게 차를 몰아 여수에 당도했다. 동백은 듣던 것 이상으로 화려하고 곱게 피어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욕심 없어. 이만 하면 충분해.”
아내는 몹시 흡족해했다. 먼 길을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 동백이 아름다웠던 건 남도라는 섬과 바다와 겨울과 그리고 그 꽃을 보겠다는 아내의 간절함이 이루어낸 작품이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향일암을 안 볼 수 없잖아.”
더 이상 욕심이 없다던 아내가 또 욕심을 부렸다. 지금은 타계하신 어느 스님과 어느 잡지사의 동화작가와 어느 수녀님이 그 절에서 만났다는 오래전의 이야기를 꺼냈다.
인근 돌산도의 끝 지점, 가파른 금오산 중턱에 향일암이 있었다.
들판 같이 망망한 바다. 아득한 수평선, 간간히 하늘을 나는 바다새들과, 귀항하는 어선. 그리고 은은히 부처를 사모하는 독송 소리, 남도 식물의 푸르름. 향일암은 마치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작은 별 같았다.
나무 그늘에 앉아 쉬는 내 눈에 동아줄에 매달아놓은 소원 쪽지가 들어왔다. 여기까지 찾아와 소원을 적어두고 간 이들의 속생각이 궁금했다. ‘우리 가족 행복하게 해주세요’, ‘우리 진명이 취직시험 합격하게 해주세요’, ‘남편 하는 사업 번창했으면 좋겠어요’, ‘엄마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가만 가만 읽어나가려니 그들의 소원이라는 것이 또한 나의 소원 같기도 하고, 내 사촌 누이의 소원 같기도 했다. 왠지 모를 아픔과 고단함과 절박함마저 느껴졌다. ‘우리 아빠 취직하게 해 주세요’, ‘경수야, 이제 마음잡고 학교 다녀주면 좋겠다’, ‘며느리가 자꾸 엇나가네요. 어쩜 좋아요’.... 그냥 지나쳐 볼 때엔 그저 남 말 하듯 소원 참 많기도 하구나 했는데 그게 우리 사회가 처한 우리들의 목소리였다.
‘로또대박!’ 이런 황당한 소원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좋은 집 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한 다리를 주셔서 행복합니다’, ‘세상 보는 눈이 좋아졌어요’ 이런 소원을 읽을 때면 나도 저절로 행복했다. 예쁜 소원도 있다. ‘아들딸 하나씩 주셔요. 이쁜 걸로.’, ‘남친이 생기고 오래 가고 그래서 행복한 연애를 하고 싶다’, ‘연주 ♡ 경서’, ‘그리워, 쟈니!’, ‘오빠 행복’.... 젊은이들의 사랑이 묻어있는 향기로운 소원이었다.
그 많은 소원 쪽지들 중에서 또 몇 장을 들추었다. ‘사람을 미워하지 않게 해주세요.’, 그 곁에 이런 소원도 있다. ‘1년에 한 번 여유있는 여행하기’, ‘내가 아는 이들이 행복하기를’, ‘부처님 건강하세요’. 확실히 ‘로또대박’ 소원하고는 좀 편안해진 소원이다. 이타심이 느껴진다. 1년에 한번 여유있게 여행하기를 바라는, 그이의 마음이 내 마음에 와 닿는다. 마음과 시간이 여유롭고, 여행에 푹 빠지는 그런, 나를 돌아보는 여행을 하고 싶다.
부처님의 건강을 비는 그는 누구일까. 무언가를 요구하고, 바라는 소원이 아니라 오히려 절대자의 건강을 비는 그이야말로 참 아름다운 사람이겠다. 그이의 마음이 저기 대양만치 크겠다. 누군가를 사뭇 염려하는 마음이 대양만치 깊겠다.
소원 쪽지에서 생각을 거두고, 차들이 질주하는 남부순환로를 내다본다. 여기까지 나는 어떤 소원을 마음에 두고 달려왔을까. 소원이 있었다면 소원은 이루었을까. 향일암을 떠올리며, 살아있는 지금 이 시간을 맞고 또 보낸다. 석탄일이 가까운 5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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