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나를 충전한다

권영상 2018. 5. 6. 15:41

나를 충전한다

권영상




땅을 떠밀고 호박씨가 올라온다. 연두색 떡잎을 마주 편다. 충전판을 닮았다. 햇빛을 받으면서 떡잎은 점점 초록으로 변한다. 그러니까 떡잎은 지금 햇빛 충전 중이다. 저렇게 햇빛을 충전하여 호박씨에서 호박순으로 몸 바꾸기를 하고 있다. 이 순간은 사뭇 위중하다. 애벌레들의 우화처럼 화려하기도 하지만 위험도 따른다. 머뭇거리거나 상처를 받으면 그걸로 생은 끝이다.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멈춘다. 해마다 보아오는 일이다. 그러나 햇빛 충전에 성공한다면 그에겐 아름다운 여름과 가을 선물이 기다리고 있다.



인생을 사는 사람 역시 충전이 필요하다.

어린 시절, 중학교를 마치고 나는 무려 3년이라는 긴 시간을 배회했다. 어머니의 장기간 우환으로 오래도록 실의에 빠졌다. 싸우고, 술 마시고, 떠돌고, 일 없이 놀고..... 정상적으로 써야할 힘을 소모적인 일에 쓰느라 나를 모두 방전해버렸다.

그 당시 내게는 다시 일어설 충전이 필요했다. 그러나 내겐 그럴 힘이 없었다. 주위 분들이 진학을 권유하고 일자리를 구해주려 했지만 나는 돌아섰다. 나중에 뭘 먹고 사려고 그러느냐며 나를 탓했지만 내게는 아무 의욕이 없었다. 그때, 고향의 호숫가에서 넝마주이를 알게 되었다. 그는 나보다 겨우 한 살 많았지만 나와 달리 가족의 생계를 짊어지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하루치 일을 하면 그걸로 그와 술을 다 마셔버렸다. 어느 날, 나는 그와 싸웠다. 술 한 잔 살 줄 모른다는 내 빈정거림 때문이다. 그가 웃옷을 벗어 땅바닥에 메어치며 소리쳤다.

“너는 술 마시기 위해 일하지만 나는 가족을 살리기 위해 일한다구!”

그는 그렇게 맨 몸으로 나를 떠났다.

그 순간 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술에 취했음에도 알았다. 힘들게 일해도 동생 약값을 대지 못해 어린 동생을 잃을 뻔 한 적이 있었다던 말이 떠올랐다.



그 일 이후, 나는 나의 지루한 일상을 털고 일어섰다. 그의 말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내 몸이 감전되는 것처럼 아팠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의 말이 나를 충전시켰던 거다. 비로소 나는 스스로 걸어 진학의 길로 들어섰다. 3년만이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가 내게 던져주고 간 말을 잊지 않았다. 방전을 느낄 때마다 나는 충전의 근원을 그에게서 찾았다.

충전엔 꼭 용량 큰 배터리만이 필요한 게 아니다. 지나쳐 들은 사소한 말 한 마디가, 풀잎을 스치는 바람이, 얼핏 비껴가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아무 의미 없는 듯 한 농담이, 누군가의 조롱이 나를 충전한다.



우리 몸은 그렇게 충전되어 그 힘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내 힘만으로 이 험난한 파도를 헤쳐 가는 듯 해도 그게 아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나를 둘러싼 타자들과의 접촉을 통해 수시로 나를 충전하며 산다. 큰 충전으로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기술도 필요하지만 작은 충전으로 그때그때 자신을 새롭고 푸르게 만들어가는 기술도 필요하다.

한 사나흘 휴가를 얻어 쉴 때나 여행 중에 번번이 느끼는 게 있다. 이렇게 놀다 내 감각을 몽땅 잃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다. 실의에 빠져있을 때도 그렇다. 실제로 그런 경우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힘들어한 적이 있다. 그때마다 나는 누군가의 시 한 구절에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멘트에서, 힘든 삽질에서 충전 받으려 애쓴다.



오늘은 텃밭 호박 떡잎을 본다. 볼수록 태양열 충전판을 닮았다. 어쩌면 태양열 충전도 어느 과학자가 이 호박 떡잎에서 그 모델을 차용했을지 모른다. 나는 내 방식대로 호박 떡잎이 씨앗에서 덩굴로 변태하는, 위험하나 화려한 충전법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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