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 1편과 동시와 관련된 단상
바닷가에서
권영상
바닷가
모래톱에 그린 물고기.
파도가 지나간 뒤에 보니
사라지고 없다.
바다를 본다.
내가 그린 물고기들이 헤엄쳐다닐
저 파란 세상.
뒤란 참나리꽃
권영상
뒤란에 장독대. 식구가 많았으니 독도 많았다. 가끔 독 뚜껑을 열어보았다. 된장, 막장, 고추장. 간장 담은 간장독, 소금독, 오이며 무 장아찌를 박은 고추장독. 그리고 봄이면 장을 담그고 빨간 고추와 검댕 숯을 띄운 장독. 장독대 장독은 빛났다.
장독대와 김치간 사이, 그 사이에 참나리가 있었다. 누가 심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거기 참나리가 있었겠다. 붕긋한 흙더미가 온통 참나리 밭이었다. 봄부터 흙더미를 밀고 올라오기 시작하는 나리는 여름이면 어른 키보다 더 컸고, 그 끝에 붉은 꽃을 피웠다. 아버지는 참나리대가 쓰러지지 못하도록 긴 줄로 여러 번 묶으셨다.
다들 농사일로 들에 나갈 때 어린 나는 뒤란 참나리 그늘에 혼자 앉아 책을 읽었다. 책을 읽다가 참나리 꽃술 꽃가루로 손등에 그림을 그리고, 장독대 장독 사이로 난 봉숭아꽃과 괭이풀을 이겨 손톱에 꽃물을 들였다. 시끌벅적한 방안보다 뒤란이 좋아 집이 조용한 날이면 거기 참나리꽃 그늘에서 숙제를 하고, 하늘로 날아가는 제트기의 폭음을 들었다.
식구가 많은 집의 뒤란 참나리꽃 숲은 ‘나만의 뜰방’이었다. 뒤란은 어머니가 장독을 돌보러 들르실 때를 빼면 언제나 조용했다. 맛이 드는 장독의 장들과 참나리 꽃대에서 익은 꽃씨가 툭툭 떨어지는 소리가 좋았다.
어머니는 안마당을 지나가는 이들에게 뒤란 참나리꽃을 보여주고 싶어하셨다. 꽃이 필 때면 뒤란이 잘 보이도록 안방과 뒷방문을 활짝 열어두셨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로 안마당에 설 때면 활짝 열린 안방문과 뒷방문 그 너머 뒤란에 피는 붉은 참나리 꽃숲과 장독대가 너무도 잘 어울렸다. 그것은 마치 잘 그려낸 풍경이거나 정물화 같았다. 어쩌다가 바느질을 하는 어머니가 안방에 앉아 계실 때면 그것은 또 그것대로 아름다웠다.
그 후 고향을 떠나 외롭게 도회의 삶을 살다가 문득 뒤란의 참나리가 그리우면 고향집을 찾고는 했다. 식구들이 많을 때나 다 떠나가고 어머니 혼자 계실 때나 뒤란은 여전히 조용했다. 거기 참나리꽃 그늘에 앉으면 세상을 살아가느라 입은 상처들이 소리없이 아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여기가 내 동심이 태어나고 자란 자리, 그러니까 내 동심의 발원지쯤인 듯 해 상처 입은 마음의 회복이 쉬이 이루어졌다.
아버지 가신 뒤부터 몇 아름이나 되는 참나리들을 긴 끈으로 묶어주는 일은 내가 했다. 그때마다 그 그늘 아래에서 숙제를 하고 책을 읽고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던 한 아이를 본다. 남북전쟁이 고비를 넘기느라 소총소리 요란히 울리던 시절에 그 아이는 태어났다. 그래서 작은 일에도 겁이 많았고, 놀라기를 잘 했다.
아이는 그렇게 커서 어른이 됐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그렇듯 나도 아파트에 몸을 담고 살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잠금쇠의 번호키를 누르면 문이 열렸고, 그 집에 들어서면 대개 다음날 아침이어야 출근을 위해 집을 나왔다. 아파트엔 비가 내려도 빗소리를 듣지 못하고, 눈이 내려도 창문을 열고 내다볼 뿐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일이 번거로웠다.
세상일이 번거로울 무렵, 참나리꽃 피던 ‘나만의 뜰방’이 생각났다. 문득 안방과 뒷방, 그 너머 뒤란에 조용히 피어있던 참나리꽃숲, 그게 그리웠다. 나는 서둘러 직장을 정리하고 짐을 챙겼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조그마한 별을 하나 만들었다. 해바라기별. 빙 돌아가며 집둘레에 해바라기를 심었다. 제일 먼저 새들이 찾아왔다. 박새 찌르레기 곤줄박이, 멧새며 참새들. 그리고 가끔 찾아오는 옆집 나비네 누렁개. 나는 자연히 그들과 동무가 됐고, 참나리꽃 숲 대신 해바라기 그늘에서 책을 읽거나 먼데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다. 내 마음이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다. 이 별에 와 아버지처럼 농사를 짓고, 틈을 내어 동시를 쓴다. 동시라고 해 봐야 모두 박새와 곤줄박이가 불러준 노래를 받아 적은 것들이다.
내 고향, 뒤란의 뜰방을 만들고 싶어 참나리 다섯 포기를 구해 심었다. 그게 4년이 되고 5년이 되었다. 어린 백합 류가 크게 자라 꽃을 피우는 데는 느리고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리 빠른 게 미덕인 세상이라 해도 뚝딱, 참나리꽃을 보는 건 싫다. 왠지 그 그리움의 실체가 천천히 내게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시와 동화> 2018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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