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백암에 서는 백암 5일장

권영상 2017. 9. 29. 20:58

백암에 서는 백암 5일장

권영상

 

 



양지 톨게이트에서 통행료 2700원을 내자, 지갑에 남은 돈이 2000. 닷새 뒤 서울로 돌아가려면 현금이 필요하다. 밤골 가는 길에 백암 농협에 들렀다.

오늘이 26, 백암장이다. 추석 대목이다. 농협에서 현금을 찾아 나오다가 순댓국집에 들렀다. 밤골에 들어가 점심을 챙겨 먹느니 북적거리는 순댓국집 대목 분위기를 피할 이유가 없다. 언제 먹어봐도 제일식당순댓국은 좋다. 푸짐하고 넉넉한 진국이다. 그걸 한 그릇 하고 나오려니 내 발이 절로 장터 안길로 들어선다.



백암농협 뒷마당에 대목장이 섰다. 그냥 한 바퀴 빙 돌며 사람들 속에 섞여본다. 괜히 그러고 싶다. 순박한 장사꾼들과 말을 섞어보고 싶어 이것저것 묻는다. 신발더미, 싸고 좋은 옷들, 시골할머니들이 벌여놓은 햇고구마, 햇밤, 햇대추……. 그냥 돌아보려고 장터에 들어섰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밥에 안칠 햇고구마를 사고약재 좌판에서 결명자를 샀다마음씨 좋아 보이는 아낙의 인상에 이끌려 술떡 5천원어치를 산다.



“5일장을 사랑하시는 문화시민 여러분, 우리나라 속초 앞바다에서 건진 코다리를 여러분께 드리려고 일부러 모셔가지고 나왔습니다. 코다리 12마리를 만 원 한 장, 딱 만 원 한 장으로 여러분 밥상 위에 소중히 올려드리겠습니다. 이 방송을 들으시는 즉시 당 차량을 찾아주세요. 저녁이 있는 밥상을 차려드리겠습니다. 오일장을 사랑하시는......”

난데없이 당 차량이 나타나 멋진 호객을 한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선 김에 걸음을 돌린다. 다 가는 데가 있다. 목물좌판이다. 목물좌판의 젊은 주인장은 장을 찾아 떠돈 지 3대째다.



백암장은 안성장에 못 미치지만 그래도 알아주는 중소장터다. 조선시대 백암은 죽산현에 속해 있었고, 백암장은 배감장(排甘場)으로 불렸는데 그 역할이 컸다. 서울, 수원, 안성을 이어주는 상권이었다.

백암장이 이름을 떨친 건 70년대 중반, 우시장이 들어서면서부터다. 우시장이 번창하자, 돼지며 쌀시장도 농업지역답게 번창했다. ‘백암순대가 전국적으로 잘 알려진 건 그 옛날의 우시장과 돼지시장 덕분이다.





대목인데 사람이 생각만큼 없네요.”

내가 먼저 인사를 드린 이는 안성목물 좌판 김대표다. 그이는 여전히 싹싹하다. 오늘 추석맞이 백암노래자랑이 있단다. , 그래서……. 대뜸 그렇게 받아넘겼지만 대목에는 본디 목물 사러오는 이가 없단다. 그런데도 안성목물 김대표가 이 장터에 한 자리를 떡 잡은 건 이유가 있다.

삼 대째, 팔리나 안 팔리나 60년을 고집하며 이 일을 해왔지요.



그이가 취급하는 목물이란 나무로 만든 물건들이다. 삽자루, 괭이자루, 목기, 조리, 도마, , 바구니, , 대빗자루, 지게, 발채, 대나무 갈퀴, 홍두깨, 밀대, 주걱, , , 버들고리, 도리깨, 쇠코뚜레, 다식판, 메주틀, 삼태기, 고지바가지, 빨래판, 또아리…….

하나하나 눈여겨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치유되는 것들이다. 어느 것 하나 정들지 않은 것이 없다.

이 땅엔 아직도 나무 문화를 사랑하는 이들이 있다.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농사를 업으로 하는 이들이 그들이다. 땅과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이들이다. 안성목물 김대표는 근방의 장터를 돌며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들을 만난다. 그런 까닭인지 그이의 얼굴은 언제 보아도 선하다.



나도 여기서 키를 샀고, 쇠스랑 자루를 샀고, 홍두깨 한 놈을 샀다. 이 목물 중의 대부분이 연세 많으신 부친께서 손수 만드신 거라 했다.

가시는 길에 노래자랑 한번 보고 가세요.”

김 대표가 인사삼아 그 말을 하지만 거기 들를 시간이 없다. 내일모레 안성 바우덕이 축제에 또 잠깐 들를 거면 밀린 일을 부지런히 마쳐놓아야 한다.



그이와 작별을 하고 장터를 빠져나온다.

백암이 16일 장이고, 근방 공도가 38, 죽산이 510, 김대표가 간다는 용인 송전장이 49일이다.

마트가 들어서고, 슈퍼마켓이며 상설시장이 열리는 데도 5일장은 사라지지 않는다. 거기에는 장을 찾아 도는 순박한 장돌뱅이들이 있고, 그들에게 판을 내주는 빈터가 있고, 그들을 맞아 함께 섞이는 나와 같은 무지렁이들이 있기 때문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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