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
권영상
태석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집집마다 열쇠구멍에 전단지를 붙인다. 며칠이 지나도 전단지가 떼어지지 않은 집을 열고 들어가 숙식을 한다. 빈집을 찾아 돌아다니던 태식은 어느 빈 집에서 갇혀 사는 멍투성이 여인을 만난다. 남편의 지나친 집착과 소유욕 때문에 여인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다.
남편이 돌아오자, 태석은 그녀를 두고 조용히 떠나지만 끝내 다시 돌아온다. 자신을 데려가주길 바라던 여인의 눈빛을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다시 돌아온 날 밤, 태석은 여인이 남편에게 성적으로 혹사당하는 모습을 본다. 여인은 남자에게 아무 사랑도 없으면서 마음에 없는 ‘사랑해요’를 연발하지만 여자는 끝내 태석과 함께 그 집을 나간다. 분명 사람은 살고 있지만 사랑이 없는 집. 김기덕 감독의 영화 ‘빈집’이다.
밤이면 가끔 운동삼아 길가에 나선다. 고속도로 변에 줄지어 선, 이미 불이 다 사라진 컴컴한 빈 아파트들을 본다. 재건축을 앞두고 있는 빈 집들이다. 한 때 밤이면 환히 불을 밝히고 오순도순 살았을 아파트엔 그리워할 추억도, 사랑도, 미련도 다 떠나고 없다.
집이란 어찌 보면 성적으로 혹사당하는 영화 속 여인을 닮았다. 아침에 출근을 할 때면 여인의 남자처럼 과도한 소유욕과 집착에 빠져 문을 걸어 잠그고 떠난다. 낮이 가고 다시 밤이 오면 욕망을 배설하듯 먹고, 마시고, 잠자고 이윽고 아침이 오면 또 집을 나선다. 그런 일을 집은 무려 몇 십 년이나 반복하고 있을까.
몇 해 전부터 재건축, 재건축 하던 아파트가 끝내 재건축이 되는 모양이다. 어젯밤 이쯤에서 만난 우리 아파트 관리소 직원의 말이 생각난다. 입주자들은 이번 주 안으로 모두 아파트를 떠나야 하며 내달 말엔 아파트가 폭파될 거란다. 먼지 하나 나지 않는 신공법 폭파방법으로 폭파시킨다는 거다.
그렇겠다. 포클레인으로 고층을 부수어 내릴 수는 없다. 당연히 그런 공법을 써야할 거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내 몸이 불편했다. 살던 집을 무너뜨린다는 것, 그걸 먼지 하나 없이 폭삭 폭파한다는 말에서 오싹함 같은 걸 느꼈다. 여기에 몸 담아 살던 사람들의, 아니 그들만이 아니다. 이 동네에 살던 사람들의 머릿속 기억과 추억까지 지워버린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이제 얼마 후면 이 아파트에 대한 애증마저 기억의 저 편으로 사라진다.
빈 아파트와 마주 서 본다. 거대한 허깨비와 마주 하는 느낌이다. 그것이 허깨비인 것은 내부가 비어있고, 거기 살던 이들의 영혼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거라곤 아무 의미도 없는 시멘트 덩어리와 버리고 간 낡은 세간, 벽지 위에 남은 벽시계 자국 같은 가버린 시간의 흔적들뿐이다.
집이란 영화 속 남자가 가두어둔 여인과 뭐가 다를까. 이미 여인의 마음엔 남자에 대한 사랑도 애정도 증오도 다 떠나고 없다. 남은 거라곤 여인의 빈 쭉정이 같은 버림받은 몸 뿐.
소유욕이 강한, 도시를 사는 사람들의 집이란 참 쓸쓸하다. 지치지 않고 욕망을 쫓는 도시에는 오래된 사랑도 향수도 추억도 없다. 허물고 다시 세우는 일, 그것이 욕망의 도시가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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