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에 누운 거문고 한 대
권영상
소나무 숲에 거문고 한 대가 있다. 나는 그를 만나러 아침이거나 해질녘이거나 문득 소나무 숲이 떠오르면 등산화 끈을 묶는다. 내가 말하는 그 소나무 숲이란 집 가까이에 있는 동네 산 이다. 남부순환로를 건너 한참 가면 인적 드문 소나무숲이 나온다. 거기서부터는 산비탈 오름길이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은 숲길 끝에 참호 하나.
거기서 숨을 고르느라 멈추어 서서 산비탈을 내려다 보면 눈에 들어오는 것. 은빛 거문고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거문고가 되기엔 여러 인연을 더 거쳐야 하는 크고 늙은 오동나무다. 이승에 사는 나무가 아니다. 어느 어느 적에, 얼마 얼마의 세월을 살다가 그만 이웃 소나무에 반쯤 기대어 눈을 감고 말았다. 목피는 풍우에 씻기고 벗겨져 남은 거라곤 희고 부드러운 은빛 목질 뿐이다. 그 나무가 내 눈에는 산조 한 가락을 뜯다가 늠름한 소나무 품에 안겨 잠시 잠에 든 거문고로 보여질 때가 있다.
나는 언젠가 길 없는 곳에 누운 그 오동나무를 찾아갔다.
정말이지 큰 음악의 모티프를 마음에 품고 잠시 잠 한 숨에 취해있는 듯 했다. 오동나무의 그 하얀 살결을 쓰다듬어 보았다. 살아있는 사람의 살결을 닮았다. 안족 위에 줄 여섯을 매고 당대 명인의 술대질을 만난다면 아주 근사한, 깊고 유장한 음악이 흐를 것만 같았다.
좀 미안한 짓이지만 잘 생긴 이 희고 우아한 거문고 위에 걸터앉아 눈을 감았다. 솔바람 소리인 듯 거문고 소리인 듯 맑은 소리가 귓가로 모여들었다. 그것은 개울을 흘러내리는 여울처럼 빠르기도 하고, 느리기도 하고, 폭풍처럼 휘몰아치기도 하고, 때론 다른 세상의 소리인 듯 아득하기도 하고 또한 황홀한 데가 있었다.
그러다가 눈을 뜨고 오동나무가 두고간 하늘을 보았다. 이 산중의 세월 동안 오동나무가 차지했던 하늘이 소나무 숲 사이로 펀하게 드러났다. 그러니까 그 소리라는 것은 그 하늘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구름과 바람과 아득히 높은 데를 사는 솔개의 울음소리였다.
그 후, 어찌어찌한 연유로 국악원에서 명인의 거문고 산조를 명상하듯 들은 적이 있다. 한갑득류의 산조였는데, 60줄을 실히 넘어선 듯한 그분의 손에서 우러나오는 선율은 경쾌하거나 장엄하거나 했다. 그분이 타는 산조는 바람과 흥으로 지어내는 아흔아홉 칸의 집과 같았다. 그때 늦은 밤, 남산 길을 걸어나올 때 언뜻 떠오르던 것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우면산 오동나무다.
내가 오르는 그 산엔 오동나무가 많다. 이 골짝 저 골짝 서 있는 것만도 좋이 열 그루는 넘을 듯 싶다. 두어 아름짜리 나무들로만 그렇다. 그것들이 애초에 거기에 어떤 연유로 정착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그들은 그 깊은 산중을 저들 음악의 거처인 양 살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이것이 나의 나쁜 버릇이기도 하다. 오동나무 앞에만 서면 내 눈에는 나무의 후덕하고 넉넉한 몸에 숨은 가야금이나 거문고 한 대가 들어온다. 어렸을 적 마당에 선 늙은 오동나무를 악기에 쓴다며 장인들이 아버지 허락으로 가져간 후부터다.
늦은 밤 컴컴한 창밖을 내다볼 때면 가끔 산중에 홀로 누워있는 은빛 오동나무를 생각한다. 멀지도 않은 거기쯤 그 나무가 정인처럼 누워있음을 생각하는 건 좋다. 어쩌면 지금쯤 오동나무는 거문고 한 대로 반듯이 일어나 앉아 골짜구니 가득 음악을 풀어내고 있을지 모른다. 이런 밤은 깜깜해도 깜깜한 것 같지 않고, 무음의 적막이어도 적막 같지 않다. 한바탕 휘몰고 가는 현 위의 산조처럼 황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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