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삶의 축적이며 시대의 축적
권영상
청탁을 다급하게 받았다. 방정환문학상 시상식에 <아동문학평론>지를 배포해야 한다는 거다. 지난해에도 그랬으면서 나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봄호 원고를 넘긴지 불과 열흘도 안 되었기 때문이다. 사정이 촉박하게 됐다.
부랴부랴 여름호를 쓸 궁리부터 했다. 그런데 가장 난감한 것은 여름호 계절평을 쓸 텍스트가 없다는 점이다. 있다면 격월간지 <동시마중>과 <어린이와 문학>과 다행히 이르게 받은 <아동문학세상> 봄호 뿐이다. 그래도 뭔가 부족했다. 늦게 도착해 언급을 못한 과년호 <아동문학평론>를 찾아들었고, 마침 이 무렵에 도착한 쪽배 동인의 엔솔로지 <동그란 리본으로 노랗게 핀 영혼들>도 궁여지책으로 집어 들었다.
그러기로 하고 텍스트를 읽는 동안 우연찮게 <아동문학세상>에 실린 조선족동시인 특집을 발견했다. 이쯤에서 내가 다루어야할 8편의 동시가 만들어졌다. 조선족동시인 동시 2편, 쪽배동인 동시 2편, <동시마중>과 <어린이와 문학>에서 각 2편, 이렇게 묶기로 했다. 쓰는 사람 편의주의가 눈에 거슬리겠지만 나름 서로 연관성은 있었다. 다만 텍스트 단위로 묶는 바람에 중언부언이 불가피하지 않나 걱정이다.
1.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어린아이가/ 광장에서/ 버들강아지 손으로/ 촛불을 들었다.// 늘/ 버들강아지는/ 긴 겨울을 이기고/ 봄을 데리고 왔다.
-고광근의 ‘광장에서’ 전문 <동시마중> 2017년 3,4월호
하늘 국자가 저토록 크니/ 하늘나라에선 모두 배부르겠네// 멀리서 저 별을 보는 아이도/ 한 그릇 가득 먹으면 좋겠네// 세상 모든 밥그릇이/ 하늘 국자로 한 국자씩만// 그득하게 그득하게 담기면 좋겠네
-김유진의 ‘북두칠성’ 전문 <동시마중> 2017년 3,4월호
두 편 모두 시 속에 현실을 담아내고 있다. 고광근의 ‘광장에서’는 탄핵 정국을, 김유진은 배불리 먹을 수 없는 이쪽 현실을 그리고 있다. 나즉나즉하면서도 아픈 우리의 모습을 잘 그려낸 서정 동시들이다.
우리에겐 혁명에 가까운 정변이 지난겨울 석 달 동안에 있었다. 고광근의 ‘광장에서’는 그 집회 장면을 그려내고 있다. 2016년 10월말부터 시작된 일명 촛불시민 집회는 무려 19차례 있었고, 그 결과 올 3월 권력의 수장은 파면되었다. 이 집회에 참여한 연인원을 위키 백과는 1600백만 명이라 했다. 굳이 독일 비평가 아도르노의 아우슈비츠 이후 시의 역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 사건에 대한 시인의 임무가 있는 건 분명하다.
고광근은 이 사건을 쉽게 정리하고 있다. ‘긴 겨울’은 촛불을 든 ‘버들강아지 손’의 힘에 의해 쫓겨나고 끝내 광장엔 봄이 왔다고 말한다. 누구도 봄을 막지 못한다는 설정으로 화자의 염원이 당연히 이루어질 것이라는 당위성이 바탕에 깔려 있다. 이런 정치사회적 이슈를 어린이들이 읽을 수 있는 동시로 승화시켜낸 점이 놀랍다. 불필요한 정치사회적 언어가 배제된 간명함에 그 원인이 있는 듯하다.
김유진의 ‘북두칠성’은 늘 배부른 하늘나라와 배부르지 못한 이쪽 지상의 나라를 두 축으로 삼는다. 두 축으로 나누는 동기는 늘 배부르게 먹을지도 모르는 커다란 하늘 국자, 북두칠성이다. 우리가 사는 이 지상에선 3초에 한 명씩 기아로 죽어간다는 보도가 있었다. 지금 우리에겐 쌀이 떨어져 밥을 굶는 아이보다 끼니를 거를 수밖에 없는 결손, 구타, 음주폭력, 생계형맞벌이 등의 가정환경 때문에 굶는 아이가 많다고 한다. 하늘 국자에 담기는 것이 밥이 아니라 ‘부모의 가득 담긴 정’이라 바꾸어보면 이 시의 의미가 더욱 절실해지겠다.
2.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는 것
“아프지 말고/ 잘 자라야 해.”// 헤어지기 전날 밤/ 엄마가/ 여자아이를/ 끌어안고 있다.// “지금은 헤어지지만/ 나중에 데리러 갈게.”// “꼭 데리러 와야 해.”/ 아이가/ 엄마 얼굴을 올려다 본다.// “엄마 없다고 울면 안 돼.”/ 아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얼마나 울었는지/ 이젠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가물거리는 촛불/ 아이와 엄마 얼굴/ 비춰주고 있다.
-손광세의 ‘마지막 밤’ 전문 <아동문학평론> 2016년 가을호
시멘트 포장의/ 산길에/ 뚜벅뚜벅// 산짐승/ 발자국들/ 선명하다.// 계곡 물에/ 시멘트 묻은/ 네 발을 씻으며// 산짐승은/ 얼마나/ 불평이었을까.// -멀쩡한 통행로에 시멘트는 왜 발라!
-공재동의 ‘산길’ 전문 <아동문학평론> 2016년 가을호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이어야할까. 모르긴 해도 서로 생명을 존중하는 사회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위의 두 편의 시는 그 삶이 지금 몹시 위태롭다.
손광세의 ‘마지막 밤’은 암울과 불행이 도사린 예측할 수 없는 위태로운 밤이다. 공간을 암시하고 있는 소재는 ‘가물거리는 촛불’. 어쩌면 성당일지도 모르겠다. 성당 안엔 지금 작별의 밤을 맞는 두 모녀가 있다. 혼자 힘으로는 그 무엇도 해결할 수 없는 어린 여자아이와 그를 두고 떠나는 엄마다. 엄마는 여자아이에게 아프지 말고 잘 자라라고 한다. 나중에 데리러 오겠다고 한다. 그 말을 어린 여자아이는 믿는다. 이 두 모녀의 마지막 밤을 지키는 건 이들 모녀관계의 해체를 안타까워하는 ‘가물거리는 촛불’뿐 이들의 운명은 아무도 모른다. 시인의 감정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깔끔한 시다.
공재동의 ‘산길’은 시선이 사람 중심이 아닌 ‘산짐승’ 중심에 가 있다. 이 시를 이해하는 데엔 우리나라 도로 포장률부터 알아야겠다. 2015년도 우리나라 도로 포장률은 91.6%이다. 서울은 가히 100%이다. 도로포장은 사람 편의주의 때문에 한다. 근데 그 때문에 발생하는 것은 물 부족과 기온상승이다. 스며들어야할 빗물이 하천으로만 유입되고, 도시는 뜨거워진다. 그뿐인가. 위의 시처럼 시멘트 길에 쫓겨난 산짐승들은 점점 비좁은 산속으로 숨어든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생명을 무시하는 세상이다. 길을 빼앗긴 산짐승들의 불평소리가 이 시 속에서 울려나오고 있다.
3. 세월호, 팽목항, 단원고
할머니 댁 가는 길에/ 잠시 들른 팽목항// 길목마다 먼저 나와/ 손 흔드는 노란 마음// 온종일/ 나부끼며 비운 것은/ 눈물일까? 원망일까?// 그 바다 잔잔했고/ 하늘도 아름다웠다./ 아픔은 모른다는 듯/ 햇빛조차 화안했다.// 바다에/ 다가가서 외쳤다./ 미안해고 미안해요!// 할머니 댁에 모여 앉아/ 송편을 빚으면서도// 마음은 거기 있었고/ 나는 배가 아팠다.// 팽목항, 슬픔 품은 바다는/ 마음 오죽 아플까?
-정진아의 ‘2014년 작은 추석에’ 전문 <동그란 리본으로 노랗게 핀 영혼들> 2017년 3월
벚꽃길 따라 소복이/ 싸여 있던 꽃잎들이// 한바탕 돌개바람에/ 비명을 지르다가// 하나로 온통 뒤엉겨/ 부둥켜안고 웁니다.// 문득 소용돌이치는/ 세월호 팽목항 단원고........// 어제도 꽃비 맞으며/ 지나쳤던 그 길인데// 오늘이 그날이라서/ 목덜미가 시립니다.
-박경용의 ‘그날이라서’ 전문 <동그란 리본으로 노랗게 핀 영혼들> 2017년 3월
위 두 편은 쪽배 동인의 ‘세월호’를 주제로 한 <동그란 리본으로 노랗게 핀 영혼들>에 수록된 18편의 작품 중 아무렇게나 취한 두 편의 동시조이다. 세월호는 안산 단원고 학생 325명과 일반인 151명 등 476명을 태우고 인천을 출발 제주도로 가던 도중 2014년 4월 16일 진도 팽목항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그러니까 정진아의 ‘2014년 작은 추석에’는 그로부터 약 5개월이 지난 뒤에 쓴 작품이다. 5개월이란 그 시간은 충격적인 감정과 분노를 삭일 시간은 분명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시인의 감정과 분노가 어떻게 다스려지는지, 그 점을 눈여겨보고 싶었다.
‘2014년 작은 추석에’의 첫째 수는 화자가 팽목항에 매달린 노란 리본을 바라보며 그것이 눈물인가 누군가에 대한 원망인가를 묻고 있다. 시인의 격정과 슬픔이 이제는 노란 리본에게 건너가 있을 정도의 거리를 본다. 둘째수의 바다는 사건을 다 잊었다는 듯 무심할 만큼 아름답다. 그 바다를 보고 화자는 ‘미안하고 미안해요!’하고 외친다. 바다가 나쁜 것도, 세월호가 나쁜 것도 아니다. 그건 사람의 문제다. 그러기에 시인은 바다를 향해 분노한 점을 미안해한다. 바다와 나의 서러운 화해의 몸짓이 그려져 있다. 셋째 수는 송편을 빚는 순간 갑자기 배의 통증을 느낀다. 나의 배가 지금 아픈 것은 세월호를 품고 있는 바다가 아프기 때문이라는 바다와 나의 합일을 보여주는, 모성이 진하게 느껴지는 시다.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면서 합일해 나가는 시다. 이만큼의 시로 승화시키는데 적어도 5개월이 걸렸다.
그 아래 박경용의 ‘그날이라서’는 그보다 더 오랜, 사건 이후 1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빚어졌다. 떨어진 벚꽃 잎들이 한바탕 돌개바람에 휘날리는 걸 보면서 화자는 그날의 아픔을 떠올린다. 그날도 화사하게 피던 벚꽃 잎이 떨어지던 4월이었다. 세월호, 팽목항, 단원고 등은 온 국민을 슬프게 했던 지금도 목울대를 울컥이게 하는 격정의 이름들이다. 그렇지만 이미 화자는 그 하루 전인 어제만 해도 그 아픔을 잊었다고 자책하고 있다. 시간성을 말하는 까닭은 용서와 화해의 눈빛을 보려함이 아니다. 그 슬픈 사건이 어떻게 시인의 몸통 속에 있는 시간이라는 그릇 속에서 녹아들고 녹아들어 또 어떤 잘 익은 세월호로 나타날까, 그것을 배우려함이다.
4. 자연의 신비한 힘
콩알 물고 포르릉/ 날던 새 한 마리/ 양지바른 봄 언덕에/ 아차, 그만 떨궈버렸네// 땅에 떨어진 콩알은/ 뿌리 내리고/ 잎을 피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 맺으며.....// 세월은 흘러 가을 되였네/ 봄 언덕을 날으던 새 한 마리/ 양지바른 언덕을 다시 찾았네// 탱탱 영근 콩알 한 알/ 다시 물고 포르릉..../ 새야 새야/ 어디로 가니/ 입에 문 콩알/ 떨어지면 어쩔래
-조봉한의 ‘새알 콩알’ 전문 <아동문학세상> 2017년 봄호
아이가/ 바자굽에 숨겨놓은/ 작은 비밀 하나// 나비도 찾지 못했다/ 참새도 찾지 못했다// 어느 날/ 두 손 내민/ 파란 떡잎// 쑥쑥/ 키 늘구더니/ 노란 얼굴 방글// 아, 너였구나/ 아이가 숨겨놓은/ 작은 비밀/ 바로 너였구나
-홍두의 ‘해바라기꽃’ 전문 <아동문학세상> 2017년 봄호
<아동문학세상> 봄호에는 연변 조선족시인 신현준, 조봉한, 홍두 세 분 시인들의 동시가 실렸다. 정말 귀하고 귀한 동시다. 이분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시작에 임하는지는 그분들의 작품이 말해주고 있다. 두 작품 모두 일상의 순간이나 단면만을 조명한 게 아니라 한 편의 시 속에 1년 또는 반년의 시간의 켜를 쌓아올리고 있다.
조봉한의 ‘새알 콩알’은 콩알을 물고 가는 새의 실수로 콩은 들판에 떨어지고, 들판은 자꾸자꾸 푸른 콩밭으로 변할 거라는 새의 신비한 힘을, 홍두의 ‘해바라기꽃’은 아이가 바자굽에 숨겨놓은 해바라기 씨앗을 자연이 눈여겨 키워준 덕에 꽃을 피워내게 되었다는 자연의 경이로움을 노래하고 있다. 생명이란 자연의 신비한 손길을 거치지 않고는 성장할 수 없다는 자연예찬적인 노래들이다.
시는 시대의 무늬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상의 이야기를 담을 때 시는 살아나고 더욱 빛나고 시대적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만드는 시들은 모두 시대의 축적이며 동시에 삶의 축적이기도 하다.
<아동문학평론 2017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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