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비평

진부함으로부터 작별하기

권영상 2017. 3. 26. 09:13


진부함으로부터 작별하기

권영상




해가 뜨고 지듯이 일상은 반복된다. 반복은 단조로워 자칫하면 나태와 권태, 무관심과 통속 등의 진부함의 늪에 빠져들게 한다. 진부란 ‘진열해 놓은 썩은 고기’라는 뜻이다. 중국의 한 농부가 어느 날 호랑이가 잡아놓은 멧돼지를 메고 집으로 돌아와 초식만 하는 이웃들에게 멧돼지 고기를 자랑했다. 고기를 구경하러 오는 이들의 발걸음이 차차 줄어들더니 이윽고 뚝 끊기고 말았다. 이웃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고기가 부패해 냄새가 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패한 고기와 함께 지내는 농부는 그 냄새를 맡을 리 없었다.



진부가 위험한 까닭이 여기 있다. 자기 자신조차 자신의 진부함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만약 당신이 진부한 시인이라면 당신은 이미 관념화 되어버린 낡은 시어들로 시를 쓰면서도 당신의 시가 참신하다고 여기는 우를 범할지 모른다.

이 세상에 시가 필요한 까닭은 일상의 단조로움에 빠지기 쉬운 동시대인들에게 매순간 삶이 새롭고, 경이롭고, 살만한 곳임을 일깨우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모름지기 시는 어제 보았던 그 일상을 처음 보듯, 처음 만나듯, 처음 경험하듯 새로워야 한다. 그게 시의 가장 큰 덕목인 ‘참신함’이다.




1. 조금만 물러서 보기



할머니가 보내 주신 보리쌀로 만든 보리밥. 입안에서 굴러다니던 밥알이 된장찌개 한 숟갈에 꿀꺽 물김치에 또 꿀꺽 넘어가더니 부릉부릉 부르릉 맛있게 먹은 보리밥이 방귀가 될 줄이야! 보리밥 싫다고 쌀밥 먹은 동생이 냄새난다고 구박이다. 엄마, 아빠처럼 나가서 뀌란 말이야! 부릉부릉 또 시동을 걸려고 하는 방귀를 꾹 참고 집 밖으로 나오자마자 오토바이처럼 달리는 방귀, 골목 저 멀리 엄마 아빠 방귀도 사이좋게 달린다. 보리밭 푸른 향기 휘날리며 신나게 달리는 방귀.

          

                                                   -강지인의 ‘달리는 방귀’ 전문 <오늘의 동시문학> 2016년 가을 겨울호



방귀를 뀌는 책이 있다./ 나보다 더 많은 꿈을 꾸고/ 짝꿍보다 더 황당한 꿈을 뿡뿡/ 방귀로 뀌는 책이 있다./ 벽돌 같은 책이 아니어서/ 밤마다 꾸는 꿈도 뿡뿡/ 방귀처럼 뀌라는 책이 있다./ 잘난 척 하지 않는 책이어서/ 엄마 아빠 몰래 선생님 몰래/ 뿡뿡 뀐 방귀마저 하늘 높이/ 쏘아 올려주는 책이 있다./ 둥둥 말풍선으로 쏘아올려/ 우리에게도 두근두근/ 인생이 있다는 걸 말해주는/ 책이 있다. 무슨/ 책일까?

                        

                                                                 -김륭의 ‘방귀 뀌는 책’ 전문 <어린이와 문학> 2017년 2월호



또 방귀 시냐, 방귀 타령이냐, 할 테지만 선뜻 써서 발표하기 어려운 게 방귀를 소재로 하는 시다. 똥을 들먹이는 시도 방귀와 마찬가지로 일단의 용기가 필요하다. 진부함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품격이냐 아니냐를 따지기 전에 용감해야 한다.


강지인의 ‘달리는 방귀’는 즐겁고 신나다. ‘부릉부릉 부르릉’ 어딘가로 달려 나가고 싶다. 그의 부릉부릉 하는 방귀 소리는 동시에 동음 계열의 오토바이 시동 음이기도 하다. 방귀가 오토바이처럼 달린다. 신나게 달린다. 골목을 벗어나 저 멀리로 사이좋게 달려 나간다. 폐쇄된 공간에서 푸슥푸슥 번져가는 방귀가 아니다. 구린내 나는 존재라고만 여기던 그런 방귀도 아니다. 낡은 상투성을 훌훌 털어내고 달려 나가는 ‘보리밭 푸른 향기’ 같은 방귀다. 이게 강지인이 만들어내는 참신성이다.


김륭의 ‘방귀 뀌는 책’은 또 무언가. 세상에 방귀 뀌는 책이라니! 그 책은 벽돌같이 굳어있는 책이 아니다. 절대 잘난 척 하는 책이 아니다. 황당하지만 꿈이 있고, 그 꿈을 키워준다. 그래서 밤마다 몰래 읽는다. 어른들은 그 책 읽는 일을 시간이나 낭비하는 짓이라 하지만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나름의 인생이 들어있다. 그 책은 말풍선을 쏘아 올린다. 그 책은 어떤 책인가? 그 책을 알려면 기존의 방귀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야한다. 그리고 위 구절들로 퍼즐을 맞출 때 그게 만화책임을. 김륭은 분명 이야기꾼이다. 만화책에 가득한 말풍선을 똥꼬에서 쏙 빠져나온 방귀로 볼 줄 아는 그의 머릿속이 부럽다.



2. 현실을 말하다



촛불집회에 다녀온 뒤/ 막대기 촛불을 들고/ 운동장을 행진하며 외칩니다./ 대통령은 퇴진하라!// 작은 촛불이지만/ 흩어지지 않고 모여서/ 쉬는 시간마다 외칩니다./ 대통령은 퇴진하라!// 미끄럼틀 위에서/ 버티다가 우는 척해도/ 속지 않고 외칩니다./ 대통령은 즉각 퇴진하라! //늦게 들어왔다고/ 화를 내는 선생님한테도/ 속으로 외칩니다./ 선생님도 퇴진하라!

                      

                                                                       -김은영의 ‘퇴진놀이’ 전문 <어린이와 문학> 2017년 2월호


나는 망태할배가 될 거야/ 떼쓰면 새장에 가두는/ 안자면 올빼미로 만드는/ 거짓말하면 입을 꿰매는/ 망태할배가 될 거야/ 자기 태블릿 PC 아니라고 발뺌하면/ 거미줄에 가둬 버릴 거야/ 돈도 능력이라고 떠들면/ 말을 빼앗아 달팽이로 만들 거야/ 팔짱 끼고 있는 손모가지로/ 반성문 백 장 쓰게 할 거야/ 제 머리도 못 틀어 올리는 할머니/ 똥은 제 손으로 닦으라고 할 거야/ 말 안 듣는 어른 잡아가/ 개밥을 줄 거야/ 돼지죽을 줄 거야/ 내가 이러려고/ 이 땅 어린이를 했나

                 

                                                                -김미혜의 ‘내가 이러려고’ 전문 <어린이와 문학> 2016년 12월호



지난겨울에 있었던 일을 우리는 알고 있다. 중대하고도 엄정한 정치적 사건이다. 위 두 시는 그 사건을 다루고 있다.

아동문학의 정치참여에 대해 우려하는 이들도 있지만 근래로 오면서 정치에 대한 관심 연령이 점점 낮아지고, 투표 연령마저 낮추자는 것이 현실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아이작 싱어의 동화 <바보들의 나라, 켈름>에는 무능하고 악한 지도자와 이들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시민들이 모여 산다. 작가는 이들의 바보스런 행동을 통해 어리석은 지도자들의 모습과 권력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우리가 겪은 정치적 사건의 찬반을 떠나 이 사건을 어떻게 문학적으로 승화시켜내느냐는 분명 시인의 몫이다.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발 빠르게 두 편의 시가 발표되었다.

김은영의 ‘퇴진놀이’는 객관적 사실들을 제시하는 직설적 어법이다. 얼핏 보면 ‘대통령을 퇴진하라’는 글 같지만 그런 행동이 옳은가를 독자가 판단하게 하는 이중의미를 갖고 있다.


김미혜의 ‘내가 이러려고’가 공감을 가지려면 독자들은 몇몇 사전 정보를 가져야 한다. ‘태블릿 PC’나, ‘돈도 능력’, ‘제 머리도 못 틀어올리는’이라든가 ‘내가 이러려고’ 등의 말이다. 그 점에서 현실 참여 문학은 그때그때의 개별적 정치 사안을 삶의 다른 축과 결합시키거나 대개의 국가에서 보편적으로 저질러지는 왜곡된 권력을 풍자, 아이러니 등의 방식으로 은밀히 포장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분명 위의 동시들은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난 일상에 대한 도전이며, 동시문학의 범주를 확장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라 보겠다.



3. 현실 비현실 드나들기



나무도 조용하다/ 사람도 조용하다// 시간도 조용히 흐른다// 할머니 이마에/ 깊게 팬 주름도 조용하다// 입가에 희미하게 번지는/ 미소도 조용하다// 톡!/ 벤치를 걸어가다 나뭇잎을 밟은 벌레가/ 놀라 쳐다본다// 모든 것이 조용해/ 그림 속에 들어온 것 같은 오후

                      

                                                                  -엄소희의 ‘조용한 오후’ 전문 <열린아동문학> 2016년 겨울호


금동대향로에 향을 사르고/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는 날이면/ 우리 집에서 음악 소리가 납니다/ 향로 속 다섯 악사 연주에/ 봉황과 기러기 춤을 추고/ 연못에는 용 한 마리 용틀임하고/ 사슴, 코끼리, 악어, 호랑이들이/ 함께 뛰노는 풀밭이 됩니다./ 아빠가 아무것도 모른 채/ 마지막 술잔을 올리고 나면/ 우리 할아버지는/ 내 뺨을 찬찬히 두 번 쓰다듬어 주고/ 산책 나온 신선처럼 사라집니다./ 할아버지, 내년에는/ 훌쩍 달라진 저를 보여 드릴게요.// 할아버지 제삿날에/ 나와 할아버지는/ 판타지 영화 주인공이 됩니다.

                       

                                                                  -이봉직의 ‘백제금동대향로’ 전문 <시와동화> 2016년 겨울호



우리가 발 디디고 사는 현실이란 늘 불완전하다. 수없이 많은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좌절하거나 고민한다. 위의 두 편의 시는 모두 현실과 비현실을 접촉하고 있다.


엄소희의 시 ‘조용한 오후’에 그 두 개의 상반된 현실이 있다. 전반부는 정지된 듯한, 그림 속에 들어온 듯한, 현실이 아닌 듯한 현실의 세계다. 여기에 나타난 나무, 사람, 시간, 할머니 이마에 팬 주름은 유한적이며, 생명 활동이 정지된 비현실 같은 현실이다. 시인은 궁극적으로 이러한 비현실 같은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 까닭은 시인의 세계가 생멸이 없는 영속적이며 영구한 것에 가 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화자는 그림 속 유한한 세상과 불화한다. 화자는 톡, 하는 벌레의 발소리가 있는 현실다운 현실을 사랑한다. 장자의 ‘나비의 꿈’ 같은,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오가는 체험이 들어있다.


이봉직의 ‘백제금동대향로’는 흥미로운 시다. 이봉직은 신라나 백제 등의 역사적 산물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는 점에서 그의 행로가 궁금하다. 위의 시는 할아버지 제삿날을 배경으로 한다. 화자인 내게는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은 간절함이 있다. 그 염원을 이루게 해주는 것이 제재인 ‘백제금동대향로’다. 이 유물은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조형성이 매우 뛰어난 백제 미술품이다. 시인은 이 ‘신비하도록 매우 뛰어난 미술품’의 힘을 빌려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나’의 만남을 가능케 하는 전략을 쓰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말이 되게 하는 그의 시힘이 결코 예사롭지 않다.



4. 위로 받을 수 없는 세상


엄마랑 싸우고/ 지구를 떠났다// 우주를 떠다니다/ 바라본 지구 속/ 대한민국 속 우리 집/ 거실 소파에서// 엄마가 울고 있다/ 지구를 떠나라고 할 땐 언제고/ 제발 돌아오라고 소리쳐 부른다// 나도 돌아가고 싶지만/ 우주선이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

             

                                                       -강기화의 ‘지금은 우주 비행 중’ 전문 <어린이와 문학> 2016년 12월호


소나기가 내려서 운다// 소나기를 맞으며 운다// 엄마가 아파서 운다// 소나기를 맞으며 나만 아는 나무를 찾아가// 나무와 함께 운다// 바람 불면// 나무도 후드득 후드득 눈물을 뿌린다// 나무도 외로워서 흔들리고 외로워서 운다// 나무는 안다// 이 세상에는 위로받지 못한 눈물이 있다는 것을// 닦아주지 못한 눈물이 외로움이 된다는 것을

             

                                                      -이창건의 ‘나무도 외로워서 운다’ 전문 <열린아동문학> 2016년 겨울호



두 편의 시 모두 엄마와 불화하거나 갈등하고 있다.

강기화의 ‘지금은 우주 비행 중’의 엄마는 불화 끝에 자식이 ‘지구’를 떠나도 잡지 않는 엄마다. 자식을 위해 양보하거나 배려하거나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는 엄마가 아니다. 물론 ‘나’도 그렇다. 이런 류의 싸움은 지금도 집집마다 일어나고 있는 그야말로 흔한 있는 일이다. 근데 이 흔한 싸움이 주목 받는 이유는 ‘집을 나갔다’ 대신 ‘지구를 떠났다’로 과장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시가 달라졌다. 지구를 떠났다면 모든 게 끝이다. 그곳은 죽음뿐이다. 그래서 독자는 긴장한다. 또 하나 뻔 한 화해의 결말을 버렸다는 점이다. 섣부른 ‘미안해’니 ‘사랑해’ 따위의 상투적인 화해를 버림으로써 시는 확실히 진부함을 벗어났다.


이창건의 ‘나무도 외로워서 운다’에는 두 개의 세계가 있다. 엄마가 아픈 이 현실과 그때마다 찾아가는 저쪽 피안의 세계다. 화자는 엄마가 아플 때마다 ‘나만이 아는 나무’의 세계를 찾아간다. 그곳엔 비를 맞으며 나와 함께 울어주는 나무가 있다. 나처럼 흔들리고 외로워하는 나무가 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외로워하는지 그걸 아는 나무가 있다. 그곳은 여기에서 받은 상처를 위로받을 수 있는 피안의 세계이다. 누구든 현실이라는 벽 앞에 서면 자신만의 세계를 꿈꾸기 마련이다. 그러나 늘 만족에 차 있는 인간은 현실 이외의 다른 세계를 모른다. 상상하는 힘이 자라는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시가 진부하지 않기 위해서는 시속의 세계가 완벽해선 안 된다. 어떤 아픔도 이겨내게 만들고, 어떤 결함도 극복하게 만들고, 그 어떤 사건도 훌륭한 도덕과 윤리라는 색안경으로 바라보면 그 순간, 시는 진부해진다. 시인 자신만 ‘부패한 고기’ 냄새를 못 맡게 된다.


<아동문학평론, 2017년 봄호 동시 계절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