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하고 명쾌한 것이 아름답다
권영상
벌써 12월입니다.
창가에 심어둔 으름덩굴 으름잎이 다 졌습니다. 몇 해 전에 심어놓은 으름덩굴인데 그 동안 맹렬하게 커올랐습니다. 무성한 잎으로 창문을 뒤덮더니 이윽고 지붕 위로 줄기를 뻗었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으름 하나 달려있지 않았을까 하고 몇 번이나 덩굴을 뒤적였지요.
그런데 서리가 내리고 으름잎 다 떨어진 어느 날, 으름덩굴 사이에 으름 하나 숨어있는 것을 보았지요. 이미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말라버릴 대로 말라버린 으름이었습니다.
그걸 보며 시라는 것을 생각했지요. 시라는 숲은 무성하고 거대하지만 막상 시를 찾으려들면 시 찾기가 어렵습니다. 숱하게 많은 수사와 수식이 시의 열매를 너무 깊이 감추거나 이파랑이를 열매로 오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지요. 겉으로 보기엔 아름다우나 좀체 그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다면 무성한 수식은 오히려 없는 것만도 못하겠지요.
지금은 그 무성한 계절이 가고난 12월입니다. 휘황한 것보다 단순한 것이, 서사가 긴 시보다 단촐한 시가 그리워질 때입니다. 명쾌하면서도 단아하고 단아하면서도 그 안이 꽉 차 있는 시 말이지요.
1. 문명에 대한 질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싸우는 모습을//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싸우는 소리를// 옥상 좁은 계단/ 그 좁은 틈 사이/ 서로 의지하고 사는/ 민들레와 강아지풀. (하략)
-선용의 ‘이웃’ 일부 <열린아동문학> 2016년 가을호
너도 해볼래?/ 스마트폰, 아주 대단해/ 이 보이지 않는 거미줄에는/ 세상의 온갖 것이 다 걸려.// 아침 이슬도 걸리니?/ 햇살에 반짝이는/
-이화주의 ‘거미의 대답’ 전문 <어린이와문학> 2016년 9월호
위의 시, 참 단촐하지요?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무얼 감추려는 수식도 수사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속을 빤히 드러내는 시도 아닙니다. 두 시 모두 인간이 이룩해 놓은 물질문명 위에 소박한 ‘민들레와 강아지풀’ 그리고 ‘이슬’이라는 자연을 놓아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물질문명의 대척점에 놓여 있으나, 시로 보아 문명이 차지했던 자리를 빼앗으려는 음모가 없습니다.
선용의 동시 ‘이웃’을 볼까요. 아파트 옥상인지, 단층의 옥상인지는 모르겠으나 하여튼 자연이 살던 땅을 갈아엎고 차지한 사람의 집 옥상에 민들레와 강아지풀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라 해봐야 계단의 좁은 틈바구니입니다. 이것만 봐도 자연을 향한 인간의 손길이 얼마나 인색한지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좁은 공간이지만 민들레와 강아지풀은 서로 의지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넓은 방을 차지하고 사는 사람들과는 달리 싸우는 소리 한번 들리지 않더라는 시입니다.
이화주의 ‘거미의 대답’은 어떤가요. 인류가 만든 위대하다는 문명, 스마트폰과 보잘 것 없다면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아침이 빛을 쏘면 한 순간 사라지고 마는 이슬이 서로 대척점에 서 있습니다. 경기로 말하자면 게임도 되지 않는 경기입니다. 그러나 그게 그리 호락호락하거나 만만한 게임만은 아닙니다. 이미 승부가 나 있을 것 같지만 인류가 살아가는 한 문명은 이슬의 순수한 자연성을 밟고 지나갈 수 없습니다. 상호 대척점에서 서로 견제해 나가야할 존재입니다. 새로운 문명이 탄생할 때마다 ‘아침 이슬도 걸리니?’라는 이 시의 질문은 끝없이 반복되어야할 것이지요.
2. 운율의 다양한 가동력
엄마 올 때까지 나는 대문간에 앉아 담장 넘어간 가지에 대추 몇 알 달렸나 띄엄띄엄 세고 세고 또 세고,// 백 스물세엣 네엣 세고 세고 또 세고,// 까만 꽁지 새 한 마리 대추나무 가지에 앉아 찌찌 찌 찝쭝찝쭝 대추 몇 알 익었나 집중해서 세고 세고 또 세고,// 익어가는 것도 마저 세고 세고 또 세고.
-추필숙의 ‘세고 세고 또 세고’ 전문 <열린아동문학> 2016년 가을호
재고 재고 재는 자벌레 아니고/ 눈만 뜨면 재는 일벌레 아니고// 잘 자는 벌레/ 잘 자고 싶은 벌레/ 잘 자고 잘 걷고 싶은 벌레/ 잘 자고 잘 걷고 잘 먹고 싶은 벌레/ 잘 자고 잘 걷고 잘 먹고/ 나비 되고 싶은 벌레// 잘 자 벌레 잘 자라 벌레
-장영복의 ‘잘 자, 벌레야’ 전문 <시와 동화> 2016년 가을호
오늘날의 시는 시의 음악성에 대한 욕구를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충족시키려는 추세를 가지고 있지요. 근데 잘 아시다시피 우리말은 소리의 엄격한 높낮이가 없는 관계로 단순히 같은 음을 반복하거나 음보율을 활용하는 정도가 고작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걸 더 폭 넓게 살려나가는 일에 대해서는 일반시보다 동시의 역할이 더 크다고 보겠습니다.
위의 두 시 모두 다양한 음악성을 시의 몸에 부여해 보려는 욕구가 눈에 띕니다.
추필숙의 ‘세고 세고 또 세고’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앞의 부분은 ‘나’가 엄마를 기다리느라 대추를 세고, 뒷부분은 가을을 기다리느라 까만 꽁지 새가 대추는 센다는 거지요. 그 단순한 내용에다 반복운율을 부여해 시의 생명을 살려내네요. 그때에 동원된 ‘세고 세고 또 세고’는 같은 음절의 반복이면서 동시에 같은 구절의 반복이기도 합니다. 여기까지는 우리 현대시가 일상적으로 해 왔던 음악적 기술이었지요. 그러나 이 시는 그 반복 구절을 각 연의 끝에 일정하게 배치해 놓음으로써 시 독법의 호흡상 마지막 부분에서 운율을 느끼려는 내적 충동을 일으키게 한다는 점이 독특합니다.
장영복의 ‘잘 자, 벌레야’는 온통 시가 운율로 꽉 차 있습니다. ‘재고 재고 재는 자벌레’라는 기본 운율이 여러 형태로 변주되어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잘 자는’의 반복어는 ‘잘 걷고’, ‘잘 먹고’, ‘잘 자’, ‘잘 자라’로 변형되어 나타나네요. 이 시는 3연이라는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실상 사용된 시어는 기껏 12개에 불과할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가 끝없이 반복해서 강조하려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나비가 되려면 잘 자고. 잘 걷고. 잘 먹어야 한다, 그 말입니다. 모르기는 해도 여기서 나비란 이제 한창 성장하는 어린아이일 테지요. 그들에게 엄마임즉한 화자가 당부합니다. ‘잘 자 벌레/ 잘 자라 벌레’ 이 말입니다. 어린 생명에게 쏟아붓는 시인의 무한 애정을 이 끝연에서 절절하게 느낄 수 있네요.
3. 딱하고 아픈 현실
대학 졸업하고 취직하면/ 세뱃돈 많이 준다고/ 큰소리치던 막냇삼촌/ 몇 년째 취직 못해/ 명절 때도/ 오지 않는 막냇삼촌/ 이번 설날에도/ 오지 않았다./ 세뱃돈이 없는 걸까?/ 내년에는 만날까?/ 막냇삼촌이 올까 싶어/ 난 자꾸/ 현관문을 바라본다.
-이중현의 ‘설날’ 전문 <어린이와 문학> 2016년 가을호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고?/ 당연히 날아서 왔지// 땅에 코를 박고 살아봐/ 얼마나 지루한지/ 날마다 밟히는 기분은 또 어떻고/ 딱새가 내 얼굴에 똥을 싸놓고 달아나버린 날/ 다짐했어 날고 말겠다고/ 하늘을 가르겠다고// 비 오는 날엔/ 몸에 묻은 흙은 조금씩 씻어냈어/ 햇볕 따가운 날에/ 따글따글 몸을 말렸고/ 바람을 들이받으며/ 조그맣게 조그마게 쪼개졌지//날마다 혼자 노는 승우를 기다렸어// 어느 저녁/ 주먹으로 스윽 눈물을 닦고는/ 승우가 나를 움켜쥐었지/ 휘리리릭/ 욕과 눈물이 튀었어/ 나도 튀었어/ 기쁘고도 슬프고도 어지러웠던 순간/ 나도 승우도 반짝 날개를 달았던 그때//잊지 못할 거야
-장세정 ‘지붕 위에 돌멩이’ 전문 <동시마중> 2016년 9,10월호
아무리 시인이 재미있고 빼어난 시를 쓴다고 해도 현실이 그 시를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암울하다면 그 시는 그저 목숨만 부지하는 시에 머물고 말겠지요.
이중현의 ‘설날’의 현실은 설날이 와도 나에게 줄 세뱃돈이 없어 오지도 못하는 막냇삼촌에 대한 걱정입니다. 막냇삼촌은 대학을 졸업했지만 아직 취직을 못했네요. 조카에게 세뱃돈을 주겠다고 큰소리친 삼촌은 지금 그 세뱃돈이 없어 ‘나’의 집에 오지 못합니다. 예전이라면 어른들이 젊은이들의 취직을 걱정했는데 지금은 어린 ‘나’가 취직을 못하는 삼촌을 걱정하는 형편이 되었네요.
모연구원의 통계에 의하면 2016년 상반기 청년층 체감 실업률이 24.1% 라 하네요. 청년 4명 중 1명이 실업상태라는 거지요. 명목실업자수가 52만명이라지만 실은 그보다 두 배나 많을 거라고 추산합니다. 이런 아픈 현실이 문학 속에 밀려드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일테지요.
장세정의 ‘지붕 위에 돌멩이’는 고통스런 현실을 벗어나 지붕에 올라간 돌멩이 이야기입니다. 돌멩이가 처한 현실은 가진 게 없어 그날이 그날 같은 지루한 일상이지요. 힘센 자의 구둣발에 밟혀야 하고, 잘난 새들의 똥 세례를 받아야 하는 처지입니다. 그것이 돌멩이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승우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승우는 분노를 견딜 수 없어 그 돌멩이를 움켜쥐고 하늘을 향해 힘껏 날려올립니다. 날아오르는 그 한 순간, 돌멩이도 승우도 마치 날개를 단 것처럼 반짝 행복했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행복은 그뿐, 더 나아질 것도 없다는 게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4. 지지와 그리움의 배경, 가족
작다고 얕보지 마세요./ 내가 없어지면 난리가 날 거예요/ 은행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국어시간,/ 수학시간은 또 어떻고요// 나 혼자/ 종이 위에 떨어져 있을 때/ 보잘것없지만/ 숫자랑 놀 때는/ 문장 속에 있을 때는/ 그 누구도 상상 못할 힘을 발휘해요//지금은 점처럼 작은/ 내 동생도/ 이 다음에는.
-오선자의 ‘점’ 전문 <열린아동문학> 2016년 가을호
들길을 걷다 멈춰 서/ 비에 젖은 나무의 냄새를 맡으면/ 그리운 냄새가 나요// 큰 눈이 내리던 저녁/ 숲으로 날아간/ 새의 찬 깃털 냄새// 놀이터에서 잃어버린/ 자석 필통 속/ 몽당연필들 냄새// 이제 더는 타지 않아/ 뒤뜰에 버려둔/ 세발자전거 냄새// 저녁에 빨아/ 부엌에 널어둔/ 덜 마른 실내화 냄새// 그리고 잠든 나를 등에 업고/ 비탈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던// 너무 보고 싶은/ 오래전 아빠의 땀 냄새
-이사람의 ‘그리운 냄새’ 전문 <시와동화> 2016년 가을호
세상이 우리를 아프게 해도 그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이들은 가족입니다. 가족은 그 어떤 경우에도 나를 지지하거나 나를 믿어주는 든든한 버팀목이지요. 그러한 가족이 있어 동시에 가족 바깥의 세상도 든든해지는 거지요.
오선자의 ‘점’은 점에 관한 시인듯 하지만 실은 내 동생을 드러내는 시입니다. 지금 내 동생은 남에게 얕보일 만큼 점처럼 작고 보잘 것 없지만 그게 아니라는 거지요. 은행의 계산에서 이 점이 없으면 ‘난리가’ 나는 것처럼 내 동생도 이 다음엔 그만한 힘을 가지게 될 거라는 ‘나’의 든든한 믿음과 확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가족이 있어 이 세상 모든 ‘나’들은 다 꿋꿋하게 살아지는 거겠지요.
이사람의 ‘그리운 냄새’의 그리움도 아빠를 향한 그리움이 드러난 시입니다. 화자인 ‘나’가 험난한 세상의 다리를 무난히 건너는 데에는 그 옛날의 아버지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올 때, 그때 아빠의 등에서 맡던 땀 냄새입니다. 그 땀 냄새의 힘으로 화자는 여기까지 왔지만 아직도 그리운 건 그 옛날의 나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이제 여기까지 왔습니다. 늘상 이쯤에서 아쉬운 것이 있습니다. 인용하지 못한 시들입니다. 시가 참 좋은데도 짝을 맞추지 못해 밀려난 시 중에 김경진의 ‘구름 빨래’, 권오훈의 ‘교실 벽시계가 째깍째깍-’, 김대성의 ‘머리깎는 날’, 권오삼의 ‘흰색 지팡이’가 있습니다. 이 좋은 시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보냅니다.
<아동문학평론 2016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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