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경대에서 만난 진달래꽃
권영상
가을은 혼례의 계절답다. 지난 토요일엔 혼사가 세 군데나 겹쳤지만 나는 고향 장조카의 혼사를 찾았다. 가을이 끝나가는 주말의 강릉길. 그 일이 최대의 위협이었지만 무리를 하여 토요일 새벽 5시에 출발해 천신만고 끝에 혼사를 보았다.
그때가 오후 2시 반. 서울로 올라가려는 내 손을 조카가 잡았다. 먼 길 왔는데 하룻밤 자고 가라는 거다. 임무를 마쳤다고 쏙 달아나는 듯 해 하루를 묵었다. 하루를 묵으면 일요일, 길은 더욱 막힐 게 뻔하다. 생각 끝에 좀 무리를 해 오색 만경대를 찾기로 했다.
해마다 설악을 찾았지만 지난해와 올해는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설악이 생각나면 나는 욱, 하는 마음으로 배낭을 꾸렸다. 천불동 계곡이며 대청봉, 용아장성, 마등령, 서북능선이 눈에 밟혔다. 아니 설악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물소리 한 가닥, 돌멩이 하나, 바람 한 줄기가 그리웠다. 근데 시월도 다 가고 11월. 이제 좀만 있으면 설악에도 눈이 내리고, 눈 내리면 산길은 끊긴다.
올가을엔 46년만의 만경대 코스가 개방됐다며 언론이 요란을 떨었다. 휴일에 만경대를 찾는 인파가 만 오천이니, 이 만이니 했다. 솔직히 나까지 그 행렬 속에 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열흘 뒤면 그 코스가 폐쇄된다는 것이 나를 달뜨게 했다.
결국 일요일 늦은 오후, 조카와 작별을 하고 양양 오색으로 향했다. 이미 만경대를 찾은 이들이 다 빠져나갔을 시각, 조용한 숙소를 찾아들었다.
이튿날 아침, 눈을 떴을 때가 8시. 운동화 차림으로 주전골 입구에 들어섰다. 눈앞에 펼쳐지는 남설악 준봉들의 위엄이 나를 압도한다. 언제 보아도 설악은 낯익다. 특유의 거친 맛 때문이다. 설악은 활달하다. 드세다. 기승전결이 없다. 처음부터 카운트 펀치를 날린다. 거칠다. 단호하다. 넋이 나가도록 휘몰아친다. 단도직입적이다. 이게 설악이다.
거대한 바위 능선을 양쪽에 두고 그 사이로 난 협소한 계곡을 따라가는 일이란 황홀하다. 이때만큼 사람이 왜소해질 수 없다. 그러나 홀홀단신 적지로 대적해 들어가는 만용과 그 어리석은 자신을 발견할 때도 역시 이때다.
가을의 계곡 속으로 뛰어든 지 한 시간여 만에 만경대에 올랐다. 노송들 사이로 저 건너편 만물상의 위용이 드러났다. 그건 신문에서 보던 사진 이상으로 감동적이다. 범접할 수 없는 저쪽의 거리. 볼 수는 있으되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그 목마름의 거리. 그것은 마치 속이고 능멸하고, 이익을 챙기는 이쪽 세상과는 분명히 다른 거리에 놓인 세상처럼 보였다. 혹독한 첫추위도 만경대의 아침을 방해하지 못했다. 사람은 때로 갈 수 없는 저쪽의 세상을 마음에 두고 사는지 모른다. 힘들 때마다 그 세상을 꿈꾸기 위해.
오래도록 만경대의 풍경을 마음에 담아 돌아선다. 내려오는 길은 짧다. 지독하게 가파르다. 이 길을 다 내려가면 나는 또 최아무개라는 이의 쇼 같은 국정농단의 이야기를 싫어도 들으며 살아야 한다. 우리는 어쩌라고 매일 이런 답답한 정치와 마주하며 살아야 하는지.
그런 속물의 세상으로 힘겹게 내려설 때다. 가파른 길옆에서 누가 나를 부른다. 진달래꽃이다. 이 추위에 피어난 분홍 진달래꽃 하나가 나를 잡는다. 그 꽃이 절망하는 나를 달랜다. 그게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숙소에 도착했을 때가 10시 10분. 두 시간 만에 나는 잠시 세상을 잊었다가 다시 바람 부는 땅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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